Christianity

거듭나기 전에 보이는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

선량사 2014. 8. 2. 07:00

“당신은 죄인입니다!” 이 한마디 말만큼 사람들을 언짢게 하는 말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라는 말을 전도의 구호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자에게만 필요하듯이 자신의 죄를 깨닫고 고통스러워하지 않는 사람은 진정으로 그리스도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불신자 중에 자기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죄의 개념을 “죄를 하나도 안 짓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라고 말할 때의 딱 그 정도 수준의 의미로 생각합니다. 만약 자신이 죽어 마땅할 정도로 패역무도한 죄인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비참함 가운데 빠져 일상생활이 어려울 정도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인식이 얼마나 복된 것인지요! 그런 괴로움이 얼마나 사람을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며 영원한 구원을 베푸시는 그리스도 앞으로 달려가게 하는지요! 좋은 약이 입에는 쓰지만 아픈 몸을 낫게 하듯이 거듭남 이전의 고통은 영혼을 영생으로 인도합니다. 다음 글은 거듭나기 전에 사람들이 보이는 다양한 모습들을 관찰한 조나단 에드워드의 보고서를 알렉산더 목사가 요약하고 분석한 글입니다.

 

죄에 대한 고민과 두려움도 사람마다 다르다

 

요나단 에드워드는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견해를 피력한다. “그 마을에 있는 사람 중 젊었거나 늙었거나 간에 영혼세계에 속한 위대한 일들에 대해 아무 관심을 가지지 않은 채 있었던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을 정도였다.” 회심한 사람들의 정확한 숫자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 같은 표현은 쓰고 있지 않지만, 대충 어림짐작하여 300명은 족히 될 것이라는 의견을 밝히고 있다. 우리는 그 보고서를 요약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보고서에 나타난 체험의 다양한 양상에 대한 기록을 선별해서 알아보고자 할 뿐이다. “사람들이 죄 용서를 받고 하나님께 열납되었다는 어떤 확신할 만한 증거에 도달하기 전에 나타낸 고민과 두려움의 정도는 사람마다 큰 차이가 있다. 어떤 사람들은 처음부터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은 소망과 용기를 가진다. 또 어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십분의 일도 마음의 고통을 겪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들 속에서 일어난 역사는 다른 사람들의 경우와 동일한 조짐을 보인다… 거의 대부분이 자기들의 비참에 대해서 두렵게 인식하는 정도가 증가하였다. 다시 말하면 그들이 구원에 가까이 접근하면 할수록 그러하였다는 말이다. 어떤 때에 사람들은 자신들이 전적으로 지각이 없다고 생각한다. 또 하나님의 성령께서 자기들을 떠났다고 두려워하기도 하고, 자기들은 법정적인 냉혹한 판단을 받도록 버림받았다고 느끼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 두려움에 대해서 매우 깊은 고통을 겪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다시 그 죄에 대한 혐오감어린 자각과 느낌을 얻으려고 큰 열심을 부린다. 각성을 받고 있는 사람들은 여러 번 염려에 빠지는데 그것은 자기들은 각성받지 않았으며, 비참하게 완고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깨달음이 없으며, 여전히 어리석은 존재로 머물러 있고, 지옥의 언저리에서 잠들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사람들이 대로는 절망의 벼랑에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그것이 마치 밤중처럼 깜깜해 보인다. 자기들 영혼에 아침이 금방 밝아올 참인데도 말이다.

 

 

율법적인 차원에서 죄를 자각하게 될 때 인간 마음의 부패는 여러 양상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어떤 때는 원수가 일으킨 것과 같은 큰 갈등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한 경우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경건한 사람들, 특히 최근에 회심했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 큰 시기심을 가진다. 자기들의 마음의 부패와 악함에 대해서 점진적이긴 하지만 더욱더 깨닫게 됨에 따라, 자기들 스스로는 더 악해지고, 더 완고해지고, 더 눈멀고, 더 나아지기는커녕 절망적으로 더 사악해지는 것처럼 생각된다… 처음에 각성이 시작될 때, 그들의 양심은 보통 겉으로 나타난 자기들의 악한 진로에 보다 더 많은 관심을 가진다. 그러나 그 후에는 마음의 죄, 자기들의 본성적인 무서운 부패, 하나님께 대한 적의(敵意), 자기들 마음의 교만, 자기들의 불신앙,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마음, 의지의 강퍅함 등과 같은 것을 깨닫게 되어 훨씬 더 큰 마음의 부담을 느낀다… 처음 각성이 있을 때보다 더 엄격하게 행하겠다고 스스로 결심하고 자기들의 죄를 고백하며, 하나님의 진노를 가라앉히려는 은밀한 기대감으로 많은 종교적인 의무들을 수행하기로 결심한다. 그런 일이 매우 흔하다. 때로, 처음 그러한 결심을 실행에 옮길 때, 그들의 정서가 어찌나 감동되던지 넘치는 눈물로 죄를 고백하고 기도한다.

 

그들은 그런 눈물어린 고백과 기도가 약간의 속죄를 이루는 것처럼 생각하고 그것들을 충분히 이용할 각오가 되어 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자기들은 더 급속하게 선해지고 있으며 금방 회심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열성과 소망은 오래 가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것들이 가능하지 못하다는 걸 금방 깨닫게 되고, 그런 다음에는 자신들이 더욱더 악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자기들 마음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악하게 군 잘못을 생각할 때 하나님의 진노에 대해 더욱더 무서워하게 되고,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조금도 긍휼을 베풀지 않으실 것이라는 큰 두려움에 빠진다. 또는 자기들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면서 큰 두려움에 빠지고, 흔히 절망 가운데서 포기해 버리고 싶은 유혹을 자주 받는다.

 

죄인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은 여러 가지

 

구원을 구하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보통 자신들에 대해 정말 무지한 상태에 있다. 영적인 것들을 똑바로 알고 자기들의 영혼 가운데서 은혜로운 행사를 바로 행해나간다는 입장에서 볼 때, 자기들은 얼마나 눈멀어 있으며,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얼마나 적다는 걸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자기들 속에 예기치 않던 부패가 자리잡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때, 자기 자신의 더러움을 씻어내고 스스로 깨끗해지려고 한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 허망한 노력을 기진하기까지 내버려 두시다가 그러한 일이 소용없음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그들이 찾는 곳에선 그 도움을 발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신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계속해서 그러한 미궁 속에서 헤매되, 다른 사람들보다 열 배 더 그리한다. 그러다가 스스로 체험해 보고 자기들이 얼마나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것은 결국 그들 자신의 체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령이시다.

 

큰 두려움을 겪지 않으면서도 매우 빠른 속도를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회심하기 전에 죄에 대해 매우 깊은 혐오감을 가지기 않았다가 ‘후에’ 그러한 지각을 더 많이 가지는 사람들도 있다. 하나님께서 율법적인 방면에서 죄를 깨닫게 하실 때 죄인들을 다루시는 방식이 어느 한 가지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사람들마다 그러한 깨달음으로 고통을 받을 ‘시기’에 있어서처럼 다양성을 보이는 면도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몇 날 동안만 그런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몇 개월 아니 몇 년을 계속 고통 받기도 한다. 율법적인 죄의 자각으로 구원의 씨를 받은 것 같은 사람들에 있어서, 고통 당한 바로 뒤에 나타나는 첫 번째 일은 하나님의 공의에 의해 자기들이 정죄 받았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자기들이 정말 지극히 죄악적이라는 걸 의식하고 그러한 느낌을 가진다. 보통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를 발견하기 바로 직전에 지극히 불안한 마음을 가진다 - 일종의 갈등이나 산란함 같은 모습을 보인다. 어떤 경우에는 단순히 고뇌만 한다. 그러나 보통은 이러한 느낌을 가지자마자 그들의 마음은 고요해지고 예기치 않은 정숙함과 냉정을 되찾는다. 언제나 그런 것은 아니지만 그런 후에 가장 빈번하게 나타나는 양상은 심령의 중압감을 벗어버린다는 것이다. 또는 어느 땐가 하나님께서 은혜로우실 것이라는 보편적인 소망을 가지게 된다. 긍휼에 대한 어떤 유별나고 특별한 발견을 하기 전에도 그러한 소망을 가진다. 보통, 그들은 자기들이야말로 하나님의 선처에 달려 있다는 결론을 내리고 ‘하나님의 때’를 기다린다.

 

 

어떤 이는 복음의 확실성을, 더러는 징표를 원해

 

어떤 경우들에서는 율법적인 차원에서 죄를 깨닫고 난 다음에 찾아오는 심령의 평온이 얼마간 계속된다. 그러다가 복음서에 계시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어떤 특별하고 즐거운 확신이 영혼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과, 충분하신 구속주와, 어떤 위대하고 기쁨에 찬 복음에 속한 일들 중 어느 것에 대해서는 위안을 얻고 달콤한 관점들이 즉각 뒤따라오는 일이 매우 흔하다. 또는 아주 짧은 시간 내에 그러한 일이 일어난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는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자기들의 상태와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첫번째 깨달음과, 완전 충분한 은혜의 발견이 시간적으로 너무 가까이 있어 그 둘이 함께 하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으로 특별한 위안을 주는 이른바 은혜로운 발견들은 많은 방면에서 매우 다양하다. 보다 빈번한 양상은, 그리스도의 완전, 충만하심과 죄인들을 구원하시려는 그리스도의 기꺼운 자세가 유별나게 부각되어 나타나는 일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에 대해 생각을 더 특별하게 고정시키며, 복음서에 나타난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비춰주는 하나님의 속성들 중 몇을 더 많이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보편적으로 복음진리와 복음의 확실성을 가장 먼저 발견하고 기뻐한다. 또 어떤 사람들의 경우에서 보면, 어떤 특별한 약속에 대한 확실한 징표를 크게 생각한다. 또 다른 이들은 하나님의 여러 초청의 말씀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신실함을 가장 먼저 주목한다. 그런 경우에는 어떤 한 가지 초청의 말씀에 마음이 기울어지는 게 보통이다.

 

어떤 사람들은 죽으실 정도로 사랑하신 그리스도 사랑의 영광과 놀라움에 크게 감동받는다. 속죄를 이루기 위해서 흘려진 그리스도의 피의 충분성에 대해서 가장 먼저 주목하는 사람들도 있다. 또는 그리스도의 순종과 의의 가치와 영광을 생각하고 감동받는 이들도 있다. 또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사랑스러움을 가장 주요하게 생각하는 이들도 많다. 반면에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마음이 넘치기도 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방식이 탁월하고 자신들의 진정한 필요를 해결해 주기에 충분한 것을 생각하고 감동받기도 한다 - 어떤 특별한 성경구절을 근거로 삼는 경우도 흔하다.

 

어떤 경우에는 많은 본문들과, 은혜로운 초청의 말씀들과, 약속들이 번갈아 가면서 마음을 오가고, 그래서 그 영혼은 위안과 만족으로 더욱더 충만하게 된다.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어느 부분을 읽다가 처음으로 위로를 받는 일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어떤 특별한 성경구절을 읽지 않았는데도 그러한 위로를 받는 일도 있다. 어떤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하나님께 속한 많은 요점들을 영혼이 단번에 보는 것 같은 인상을 주기도 한다. 반면에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어, 한 가지 요점에만 생각을 고정시킨다. 그리고 나서야 다른 것들에 대한 의식을 얻는다.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의식을 갖게 되는 일에 더디기도 하고 또 어떤 이는 빠르기도 하다.

 

은혜의 길 가면서도 회심 사실을 자주 잊어

 

현격한 은혜의 역사(役事) 중 가장 먼저 유별나게 생각되는 분은 보통 그리스도이시지만, 그러나 언제나 그렇다고 말할 수 없음을 고백해야 할 것이다. 어떤 경우에는 그리스도가 노골적인 생각의 대상이 아니라 함축적인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 본질상 자기들은 사망의 징벌밖에는 당할 게 없었다고 생각할 때,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이 충분하다는 기쁨에 찬 만족한 증거로 위안을 받는다. 다시 말하면 자기들의 죄 때문에 하나님께 열납 받는 일이 방해 받지는 않을 것이며, 하나님은 전세계를 포용할 충분한 긍휼을 가지고 계시다는 만족할 만한 증거를 통하여 위안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를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는 조짐을 전혀 나타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복음 안에서 드러난 긍휼이 그들의 용기와 소망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들도 후에는 그리스도에 대하여 독특하고 분명한 요점들을 발견한다. 아울러 그리스도를 향한 살아 있고 특별한 믿음과 사랑의 역사를 나타낸다.

 

사람들이 복음을 자기들에게 열려진 구원의 근거로 삼고, 아름다운 전망으로 자기들의 마음을 달랠 때, 자기들이 회심했다는 것에 대하여 아무것도 생각지 않는 일이 흔하다. 그들에게 있어선 그 나름의 영광스러운 본질 자체만으로도 즐거운 것이다. 또한 그 관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전혀 새롭고 즐거운 개념들을 얻게 되고, 회심을 추구할 용기를 크게 얻는다. 또한 자신들을 하나님과 그 아들에게 드릴 마음의 굳건한 결심을 한다. 그들의 영혼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거룩하게 휴식을 취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랑하는, 은밀한 성향을 가지게 되고, 이러한 방식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축복들을 소망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지금 회심했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런 생각이 자기들의 이지에까지는 미치지 못한다.

 

죄 용서가 성화를 내포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들에게 제시된 하나님의 긍휼과 완전한 구원 속에서 느끼는 이른바 참된 만족이 이 긍휼을 진정으로 받은 결과임을 알지 못한다. 또한 그것이 그 긍휼을 받는 명백한 증거라는 것도 알지 못한다. 은혜로운 행사와 체험의 길을 따라 오랫동안 계속 가면서도 자신들이 회심했다는 생각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오히려 그와는 정반대되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린다. 그들이 어떤 특별한 교육을 받아서 도움을 입지 않는다면 그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그러한 상태를 계속 견지할지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

 

여러 해 동안을 전적으로 이러한 방식으로 살았던 사람들이 분명히 있다. 율법적인 의미에서 죄를 자각하게 되었으면서도 가장 큰 공포를 가지고 언제나 가장 큰 빛과 위안을 얻지 못하는 자들도 있다. 그리고 빛이란 언제나 가장 빠른 속도로 전달되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생각으로는 그런 사람들에 있어서 회심의 ‘때’를 알아내기는 가장 쉬웠을 것이다. 회심시키는 감화력은 일반적으로 확실성에 대한 특이한 깨달음을 주며, 종교에 속한 위대한 것들의 실상을 특이하게 깨닫게 한다. 비록 어떤 경우에선 그러한 일이 훨씬 더 강하게 일어나기도 하고, 회심할 당시보다 회심한지 얼마가 지나서 그러한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태어남에 앞서 잉태는 오래 전에 이미 된 것

 

이상의 진술에서 언급된 종교체험들은 부흥에 대해서 대단히 친숙한 사람들에게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이상의 보고내용에서 언급된 것들을 자기들도 관찰했다는 걸 인식할 것이고, 자기들이 관찰하였고, 기록하였고, 이스라엘의 그러한 선생에 의해서 배포된 사실과 같음을 보고 기뻐할 것이다. 내가 지적하고 싶은 오직 한 가지 요점은, 위안을 받는 시기와 중생하는 시기가 언제나 같을 것이라고 생각들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위안을 받는 시기를 회심의 시기로 말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 새로워진 영혼의 행사들이 위기에 도달하고, 전에는 약하고 희미했던 믿음이 힘을 내어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정통적인 입장에서 글을 쓰는 사람들은 갱신된 영혼들이 가장 먼저 그리스도에 대한 관점들을 가진다는 견해들을 거의 다 가지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관점들과 그에 수반하는 위안에 뒤이어 즉각적으로 율법적인 의미에서의 죄의 자각이 올 때 이러한 견해는 수정될 수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들 때문에 죄의 자각을 체험하는 일은 진정한 회개자만이 가진다고 믿는 것이 합당하다. 여기에 보고되고 다른 사람들이 관찰한 거의 모든 경우에서 죄인을 정죄하시는 하나님의 공의를 분명히 보고 그것이 옮음을 인정한다.

 

앞장에서 진술된 바와 같이 영혼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은 이러한 느낌들을 체험하기 전이라는 데 의견이 모여지고 있다고 생각지 않을 수 없다. 그 점은 어둡고도 두려운 폭풍의 밤 뒤에 따라오는 주목할 만한 ‘고요’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 믿는 자 속에 이런 식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는 것은, 마치 어린 아이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과 같다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린 아이가 잉태된 것은 오래 전의 일이다. 그처럼 체험에 있어서 관심 있는 요점은 ‘새로 태어남’이다. 그러나 영적 생명의 씨앗이 보통 그전에 존재하기가 쉽다. 그밖에, 위안이 영적 생명의 출생을 알려주는 분명한 증거는 전혀 될 수 없다. 주 안에서 강한 사람들이 된 어떤 사람들은 슬픔 가운데서 거듭날 수 있다. 그들은 웃을 수 있기 전에 먼저 애통해 했다. 그러나 영적 탄생에 있어서 기쁨과 슬픔은 흔히 서로 멋지게 얽힌다.

 

아키발드 알렉산더, <영적 체험, 회심에서 임종까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