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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ity/생각

지하철에서 맹인을 만나다

최근에 있었던 일은 아니지만 언젠가 지하철에서 맹인을 만난 적이 있다. 그냥 스쳐지나간 게 아니라 내가 그분을 어느정도 안내해드리게 되었다. 자발적으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어딘가를 가고 있었던 나는 잠시 화장실에 들르려고 지하철에서 중간에 내렸다. 화장실을 나와 다시 지하철을 타려고 내려가려는데 역무원이 이 분을 좀 안내해드릴 수 있겠냐고 부탁을 했던 것이다(내가 화장실 갔다오느라 옆에 나있는 문을 열고 들어갔었는데 처음에는 역무원이 그것 때문에 뭐라고 할려고 날 부르는 건 줄 알았다ㅋ).

 

맹인 지하철지하철에서 만난 맹인 아저씨

 

얼떨결에 맹인 아저씨를 모시고 지하철 타는 곳까지 내려가게 되었다. 마침 지하철이 방금 도착했다가 떠났는지 많은 사람들이 출구 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 많은 인파를 뚫고 아저씨와 나는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을 내려가는 그 짧은 순간에도 수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 분은 매번 이렇게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서 지하철을 타셨던 걸까?' '외출을 자주 하지는 못하시겠지?' '그러면 주로 무엇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실까?' 등등 수많은 의문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윽고 지하철이 역에 도착했고, 아저씨를 부축해서 지하철에 무사히 탔다. 그런데 이 아저씨가 어디에서 내리실 건지가 문제였다. 만약에 내가 내리는 역보다 전에서 내리신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나보다 더 멀리 가시는 거라면... 약속 시간에 늦을 것 같아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일단 어디서 내리시냐고 여쭈어보았는데 아저씨는 뜻밖의 대답을 하셨다.

 

이제부터는 알아서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순간 나는 '대체 어떻게...?'라는 생각 밖에 안 들었던 것 같다.

 

맹인 지팡이맹인이 되면 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많아진다

 

눈이 안 보이시니 순전히 청각을 의지해서 자신이 언제 내려야 하는지를 파악해야 한다. 지하철 안내방송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게 그렇게 썩 잘 들리지 않는데 그러면 이 아저씨는 역의 순서를 다 꿰고 있거나 계속 온 신경을 집중하여 안내방송을 들으셔야 할 것이다. 눈이 보이는 사람이라면 그냥 고개를 들어 지금이 어느 역인지 살피면 되는데 그 간단한 것을 못하는 것이다.

 

자신이 언제 내릴 지를 알았다고 해도 내린 다음이 더 큰 문제다. 내려서 어디로 걸어가야 하는지, 몇 번 출구가 어느 쪽에 있는지를 대체 어떻게 알아야 한단 말인가?!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일어나서 내가 끝까지 모셔다드리겠다고 말씀드렸지만 아저씨는 자주 가는 곳이라 괜찮으시다며 한사코 내 제안을 거절하셨다.

 

아저씨는 나보다 먼저 내리셨다. 아저씨는 내리셨지만 아직도 수많은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저 아저씨는 책장에서 책을 어떻게 찾아내실까? 아, 애초에 점자 책이 아니면 책을 꺼내도 읽을 수가 없겠구나.. 밥은 어떻게 드실까? 눈이 안 보이면 먹고 싶은 반찬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렇게 한참 생각을 하니 눈이 안 보인다는 것은 정말 정말 무서운 일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그것은 정말 생생한 깨달음이었다. 맹인을 눈앞에서 직접 보기 전까지는 눈이 안 보인다는 것에 대해 이렇게 몰입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이래서 현장학습이 중요하구나, 책으로 모든 것을 배울 수 없구나.. 새삼 또 깨달았다.

 

이런 생각들을 하다보니 내가 눈이 멀쩡히 보인다는 것은 정말 엄청난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대체 왜 그동안 공부하기 힘들다며 툴툴거렸던 걸까? 왜 삶이 힘들다고 불평했던 걸까? 왜 내 키가 좀 더 컸으면, 내가 좀 더 잘생겼으면 하고 바랐던 것일까!?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런 사치스러운 불만을 가졌을까!

 

시력볼 수 있다는 건 엄청난 축복이다..!

 

눈이 안 보이는 저 맹인 아저씨가 만약 눈이 보이게 된다면 분명 이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고 최선을 다하실 것이다. 그런데 나는 시각이라는 엄청난 축복을 누리고 잇으면서도 수많은 것들에 불만을 품고 살아가고 있었다. 내가 얼마나 가진 것에 감사하지 못하는 인간인지, 얼마나 갖지 못한 것에만 불평을 품는 인간인지 맹인 아저씨를 만난 덕분에 깨달았다.

 

나는 과거에는 책으로 거의 모든 것을 배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책으로 배울 수 있는 것은 한정되어 있다는 생각이 강해지고 있다. 맹인 아저씨와 함께 있었던 그 10분 남짓한 순간에 나는 책 몇 권을 읽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처절하게 배웠다. 청소년들은 많은 체험을 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많은 장소에 가보아야 한다. 그러면 내가 했던 그런 순진한 착각을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