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hristianity

구원받는 믿음과 역사적, 사변적 믿음의 차이

기독교를 회의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는 사람들이 자주 가지는 의문 중에 하나가 바로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개념입니다. 단순히 ‘믿는 것’이 어떻게 ‘구원’이라는 엄청난 사건을 일으킬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대부분 기독교에서 말하는 ‘믿음’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잘못된 개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구원받을 만한 믿음’을 ‘역사적, 사변적인 믿음’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저도 이런 오류에 오랫동안 빠져있었습니다. 그래서 ‘이성(理性)을 사용하기 어려운 지체장애인들은 어떻게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라든지 ‘기독교의 진리를 어려서부터 세뇌시켜서 구원받게 하는 것이 가능할까?’ 라는 식의 의문을 가지곤 했습니다. 저 자신도 무신론자들의 주장을 듣고 믿음이 흔들릴 때는 창조과학 세미나 같은 강의를 듣고 기독교가 진리라는 것을 스스로에게 확신시키곤 했습니다. 저는 마치 과학자가 자신의 실험 결과를 보고 어떤 과학적 사실을 확신하듯이 기독교를 믿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거듭나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하심이 없는 그런 믿음은 구원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 주제와 관련하여 좋은 글이 있어 아래에 소개합니다.

 

믿음은 바로 진리에 대한 신념

 

자, 본인이 동조하는 관점들에 따르면, 중생한 영혼에 허락된 이러한 영적인 지식은 다름 아니고 구원을 받을만한 믿음이다. 왜냐하면 지식과 신뢰심은 상호 보완적이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안다고 하면서 믿지 않는다고 하면 그것은 모순이다. 어떤 것을 믿으면서도 모른다는 일은 불가능하다. 다른 모든 정신적 행사와 구별시켜 본다면 믿음은 간단히 말해서 ‘진리에 대한 신념’이다. 어떤 사람은 믿음을 그런 식으로 적나라하게 표현한 것을 보고 어리둥절할 것이다. 또 그렇게 하면 믿음을 진리에 대한 이해의 승낙 정도로밖에 생각지 않는 것이라는 반론을 제기할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좋다. 믿음이 한결같이 모든 거룩한 감흥과 정서를 동반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해도 무슨 차이가 있는가? 보통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이 가지는 생각의 차원에서 본다면 그렇게 말하는 것이 순전한 이해의 찬동이라고 묘사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다. 이해(지각)와 의지를 너무 멀리 떼어놓기 때문에 정신적 철학이 매우 혼미해졌는데, 그러한 구별은 탁상 연구만을 고집하는 자들에게서 연유된 것이다. 그러나 의지와 이해를 그처럼 구별시킴으로써 단순한 사실을 이해의 대상으로 삼아버렸다.

 

우리가 단순한 찬동이라고 말할 때 보통 그러한 의미를 나타낸다. 찬동만 하는 것은 단순한 진리와만 관계를 가지는 것이다. 그들의 말대로 하면, 의지란 선(善) - 모든 종류의 선과 관련을 가진다. 이제 내가 말한 믿음은 어떤 대상의 진실과 아름다움과 탁월함과 선함을 한꺼번에 숙고한다. 그리고 그 대상이 우리에게 필요하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다. 성령께서 이지에 전달하는 관점은 이러한 모든 것들을 다 포괄한다. 그러므로 믿음이 다른 것과 섞이지 않은 단순행동이거나, 확고한 신념이나 확신이더라도, 믿음은 그 대상들을 이해와 의지에 연관시켜 이해한다.

 

여기서 나는 믿음에 대한 정의를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 정의는 역시 믿음의 행동을 단순하게 만든다. 그러나 그 믿음의 행동을 ‘신뢰’ 또는 ‘확신’으로 생각한다. 독자들은 드와이트(Dwight) 박사의 정의가 바로 그것임을 기억할 것이다. 그 정의에 대하여 제기할 오직 유일한 반론이 있다면, 그 정의는 너무 협소하여 그 믿음에 속한 모든 것을 함축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신뢰란 다름 아니라 ‘한 약속의 진실성에 대해 확고한 신념을 가지거나 그 진실성을 확신하는 것이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신뢰하거나 믿는다고 말할 때, 어떤 약속과 관련지어 그 말을 한다. 이 정의는 하나님의 약속을 대상으로 삼는 모든 믿음의 행위를 포괄한다. 이러한 믿음의 국면들은 확실히 중요한 것들이요, 가장 활발한 정서를 동반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진리가 다 약속의 형태를 취하고 있는 건 아니다. 하나님 말씀 전체가 다 참된 믿음의 바른 대상이다. 신적 계시의 대부분은 역사와 예언과 교리와 교훈과 관련되어 있다. 그리스도인은 약속들뿐 아니라 이 모든 것을 믿는다.

믿음의 표출은 달라도 대상인 진리는 하나

 

여기서 말하는 그 믿음이 거듭난 영혼의 최초 행위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행위이다. 왜냐하면 그 믿음의 행위로부터 모든 거룩한 정서가 열심을 끌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이 다른 모든 은혜와 아름답게 조화를 이룬다 할지라도 믿음은 다른 모든 것들과는 구분된다. 믿음의 모든 다양한 행위들은 믿는 진리들의 성질 때문에 야기되며, 사람들은 그러한 다양한 행위를 마음껏 헤아려보고 그에 부합한 명칭을 부여할 수 있다. 그러나 믿음의 본질은 여전히 단순하다. 그것은 성령의 조명으로 이해된 진리를 확고히 붙들거나 믿는 것이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사랑으로 역사하며 마음을 정화시킨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속한 것들을 그런 식으로 지각하게 되면 생각을 분발시켜 거룩한 것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러한 생각으로 말미암아 죄악적인 소욕과 소원들은 제어 당할 것이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약속들의 진실을 확신할 때, 언제나 영혼은 평안한 휴식을 취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약속들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복락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약속을 받아들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러한 축복이 있음을 확신하게 되며, 특히 약속을 받아들이는 것이 역사하는 믿음임을 그 영혼이 의식한다면, 그러한 확신은 달콤한 위안을 줄 것이다 - ‘믿음에는 기쁨과 평안’이 있다.

 

믿음을 그런 식으로 보면 거기에는 신비로운 요소가 하나도 없다. 신적 진리를 믿는다는 것은 이지의 행동이다. 정확히 말해서 다른 진리를 믿는 것이나 같다. 구원받을 만한 믿음과 역사적인 믿음, 또는 단순한 사변적인 믿음 사이의 차이는 믿는 진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두 경우는 다 동일한 진리를 믿는다. 또한 진리가 전제하는 것을 찬동하는 정도에 따른 것도 아니다. 다만 그들이 기초하고 서 있는 증거에 있어서 차이가 나타난다. 구원받는 믿음은 진리를 이해하고 이지를 향해서 믿음의 정도에 따라 진리의 참된 본질과 신령한 특징과 진리의 아름다움과 영광과 복됨을 함께 나타냄으로 말미암아 산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이고 사변적인 믿음은 교육의 선입관에 의존하거나, 이성의 여러 유추들을 의뢰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믿음의 행사에 있어서는 하나님께 속한 것들의 참된 특질에 대한 이해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아무리 미천하고 약한 신자라도 조명을 받지 않은 사람들 중 가장 지혜로운 자들에게도 숨겨져 있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소유한다. 그리스도께서 그 점에 대해서 말씀하신 바에 따르면 그러하다.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아키발드 알렉산더, <영적 체험, 회심에서 임종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