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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ity

진리와 중생(重生, 거듭남)의 관계에 대한 관점들

최근 내재하는 신성(神性)을 찾아 계발하라는 메시지가 유행하고 있습니다. 인간 안에 신적인 요소가 있으므로 그것을 계발하면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고, 더 나아가 인간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가르침입니다. 이 같은 주장이 종교 서적이나 자기계발서 등을 통해 널리 퍼지고 있는 지금, 성경에서 말하는 거듭남과 진리가 어떤 관계에 놓여있는지를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이 부분에서 기독교는 여타의 다양한 종교들과 명확히 구별되기 때문입니다. 대다수의 종교는 진리를 제시하고 그 진리를 믿거나 실천함으로써 구원을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기독교를 제외한 종교들은 진리를 통해 구원을 얻는 이 과정에서 오로지 ‘나’가 주체이며 주로 진리를 ‘깨닫는’ 방식으로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비록 진리가 제시되더라도 성령이 그 사람을 거듭나게 하지 않으시면 그 진리는 그 사람에게 아무런 효력도 발생시키지 못합니다. 다시 말해 구원을 주시는 주체는 전적으로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 선한 것이 남아 있어 스스로를 구원할 능력이 있다고 믿는 다른 종교들과 달리 기독교는 이처럼 전적 타락의 교리를 주장합니다.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시지 않으면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알렉산더 목사가 쓴 다음의 글은 이 문제에 대한 좋은 관점을 얻는데 도움을 줍니다.

 

이제, 중생의 정확한 효과가 무엇인가, 또는 새롭게 회심한 영혼의 여러 행사들이 무엇인가를 알아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부패한 사람이 타락으로 상실한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게 하는 것이 구원의 전체 경륜이 노리는 대목적이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들 말하기가 쉽다. 이러한 변화를 통해서 거룩의 원리가 심기워지며, 영적 생명이 전달되며, 이지(理智)가 조명을 받으며, 의지가 새로워지며, 생각들이 정결케 되어 하늘에 속한 것들을 바라볼 정도로 고양된다고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보편적으로 묘사하는 것만으로는 더 깊이 알아보고자 탐구하는 사람에게 충분한 만족을 줄 수 없다.

 

진리와 중생의 관계를 설정하는 관점도 다양해

 

다른 여러 가지 주제들에 있어서 은혜의 역사들을 다양하게 하는 많은 환경들을 살펴보았으니, 이제는 할 수 있는 한에서 면밀하게 이러한 역사의 진수에 속한 가장 본질적인 것이 어떤 것들이며, 그러므로 모든 진지한 그리스도인이 나타내는 것들이 무엇인지를 최선을 다해 규명해보기로 하자. 그러나 이러한 것을 알기 위한 시도에서, 우리가 뜻하는 개념들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크게 어려울 것이다. 경건의 본질적인 행사들을 묘사하기 위해, 성경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고 있는 용어들이라도 다르게 이해되며, 그 용어들을 사용하면 각 사람마다 서로 다른 개념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여 이러한 난제를 피하기 위하여 필자가 채용하는 용어들을 정의하려 한다.

 

중생케 하시는 성령의 작용의 양태가 정말 불가사의하다는 것을 계속 인정해왔다. 그리고 중생케 하시는 성령의 작용을 설명하려는 시도보다 어리석은 건 없다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 속으로 주제넘게 뛰어든다든지, 아니면 신적 작용의 알아낼 수 없는 본질 속으로 첨벙 뛰어드는 무모함을 배제하며,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마음의 본질, 영적이고 이해와 의지의 존재로서의 안간 마음이 지닌 본성과 완전히 부합한 방식으로 작용하신다는 것이다. 이 원리에 기초하여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밝혀주거나 동기들을 부여하는 것 외에는 이성적 이지(理智)를 감화시킬 방도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물리적인 작용이란 이성적 이지에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성적 본성의 자명한 원리에 따라 이해로써 진리를 숙고하고, 그 진리가 정서와 의지를 감동하여 일어나는, 이른바 진리의 도덕적 작용을 통해서 중생이 일어난다는 것이 그들의 중생이론이다. 그러나 이 이론을 주창하는 자들도 진리를 마음에 공정하게 나타내기 위해서 필요한 거이 무엇이냐에 대하여는 관점상 다양한 견해를 보인다.

 

인간 본성이 오염되지 않았기 때문에 진리를 아는 바른 지식만 필요하다고 믿는 펠라기안(Pelagian)들은 초자연적인 도움은 다 거절하며, 각 사람마다 모든 선행을 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갖추고 있으며, 말씀의 교훈에 부지런히 주목하며 자신의 자유 의지를 행사하기만 하면 일그러진 걸 바로잡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인간은 자기의 자유 의지를 통해서 자기가 기뻐하는 진로를 취하여 그리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한다.

 

반(半) 펠라기안(Semi-Pelagian)은 한 가지 그들 나름의 특징적인 관점을 제외하고는 펠라기안의 관점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진리란 진지하게 숙고하기만 하면 그것이 말하는 효과들을 산출할 것이라고 믿는다. 다만 인류가 감각으로 접촉할 수 있는 세계에 너무 깊이 빠져 있고, 땅에 속한 생각들과 염려로 가득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이 아니면 정서와 삶의 목적을 변화시킬 정도로 진리를 공정하고 부단하게 숙고할 사람이 하나도 없다고 믿는다. 그 주장에 따르면 중생할 때 신적 작용자(성령을 가리킴 - 역자주)는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 관심을 기울이도록 인도하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 일이 이루어지기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 속에 들어 있는 진리가 본성적인 이해력으로 인식되어 우리 본성의 능동적인 원리들의 모든 바람직한 효력들을 충분히 발생시킨다는 말이다.

 

 

빛이란 매개체와 성한 눈이 사물을 보게 해

 

중생을 이지에 대한 진리의 단순한 작용으로 돌려버리려는 세 번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관점들은 펠리기안의 관점이나 반펠라기안 관점들도 아니다. 그들의 주장에 따르면, 자연인은 하나님의 성령에 속한 일을 분별할 수 없다. 그리고 본성적인 이성 그대로 그러한 관점을 가지고 진리를 오래 숙고한다 할지라도 신적 형상으로 변화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조명을 통해서 죄인은 하나님께 속한 것들에 대한 새롭고 신령한 관점을 얻어야 한다. 그 얻은 관점을 통해서 그 사람은 새로워지고 중생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지 자체에 대한 어떠한 작용도 필요치 않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언하기를, 진리에 대한 이러한 영적 관점들이 틀림없이 성결의 본질적인 내용이 되는 그러한 성향들의 행사를 유도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내 판단으로는, 이 이론이 딱 한 가지 요점에 결함이 있다. 이미 진리를 교리적으로 아는 지식을 가진 사람의 이지는 영혼 자체에 미치는 어떠한 작용이 없이도 그 진리를 완전히 새로운 빛 안에서 이해할 수 있다고 상정하기 때문이다. 마치 소경인 사람이 햇빛이 밝게 비취는 곳에 서 있는 것과 같다. 그 사람은 햇빛을 느껴 빛과 색깔의 느낌을 철학적으로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자기가 보고 있는 대상이 무엇인가를 전혀 알아맞힐 수 없다. 시력장애를 일으키는 걸 제거하고 그 눈의 조직을 개선하는 수술을 받지 않은 채 자기 주위에 있는 대상물들을 알아볼 수 있는가?

 

영혼의 경우도 그것과 정말 방불하다. 빛은 충분히 있다. 중생치 않은 사람의 지성도 진리를 바라볼 수는 있다. 그러나 어떠한 효과도 기대하지는 못한다. 문제는 진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진리는 완전하다. 문제는 이지의 눈멂에 있다. 그 눈멂은 영혼 자체에 미치는 어떤 영향력에 의해서만 제거될 수 있다. 성경의 언어를 사용하자면 ‘새(정한) 마음’을 창조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만 그 눈멂이 해소될 수 있다. 사도 바울이 이방 사람들에게 보내진 것은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돌아가게 하려 함이었다.

 

사물을 분간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두 가지 요소가 필요하다. 빛이란 매개체와, 건전한 눈이다. 둘 중 하나만 없어도 그 외 다른 하나는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나 그 두 요소가 다 있을 때, 눈에 보이는 세계 속에 나타난 자연의 아름다움과 하나님의 영광을 기쁨으로 본다. 영적인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진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이지가 진리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지각할 수 있는 상태에 있지 않다면 그 진리를 듣거나 읽거나 깊이 생각해도 변화하는 효력은 하나도 얻을 수 없으며, 그 마음의 성향이 하나님을 향하지도 못하고, 이기적이고 감각적인 소욕의 힘을 제어하지도 못한다. 지각하는 존재에게 결함이 있으니, 그것을 해소할 신적 능력의 작용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중생이다. 이보다 앞선 이론의 표현방식대로 하자면, 그제야 비로소 진리의 모든 효력들이 발생할 것이다.

 

아키발드 알렉산더, <영적 체험, 회심에서 임종까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