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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ity

한 순간의 감정과는 구별되는 중생의 현격한 변화

흔히 기적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바다가 갈라지거나 물 위를 걷는 것 따위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가장 큰 기적은 악하게 살던 사람을 거룩하게 만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하나님이 흑암 중에 “빛이 있으라”고 말씀하심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던 바로 그 역사가 죄인의 어두운 마음 속에서도 일어납니다. 죄인 하나가 거듭날 때, 말 그대로 천지창조 수준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거듭나지 못한 많은 ‘자칭’ 그리스도인들 때문에 이런 놀라운 기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점점 잊어버리고 있습니다. 다음은 잊혀져 가고 있는 중생의 영구성에 대한 알렉산더 목사의 글입니다.

 

영적 역사를 인간의 느낌만으로 간파하기는 힘들어

 

어떤 사람은 공명의 힘에 대하여 위에서 말한 것을 토대로 어떤 초자연적 역사가 존재할 필요성을 전혀 고려치 않고, 모든 체험적인 종교와 모든 부흥회는 다 이러한 원리로 따져보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려 할지 모른다. 종교적인 행사와 자주 섞여 나타나는 그러한 흥분 이외의 어느 효과도 얻지 못할 경우라면, 그렇게 결론을 내려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면 도덕적 성품이 영구한 차원에서 변화되는 일이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 변화는 너무나 커서 세상의 안목을 가지고 그것을 주목한다 할지라도 ‘새 사람’이 되었다고 인정할 정도다. 하나님께 속한 일들에 대하여 그의 감상에서 뿐만 아니라 행동원리에 있어서도 현격한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모든 체험적인 종교를 인위적으로 조작한 본성적 감성에 불과하다고 단정하는 사람들은 위에서 언급한 식의 성품의 변화도 전혀 없다고 믿어야 하고, 그러한 변화를 고백하는 모든 사람들더러 다 거짓말쟁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식의 입장은 받아들일 수 없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러한 개혁보다 더 확실한 사실이 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진실하고 신실한 사람이 있다면, 이 도덕적 변화를 체험한 사람들 속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 습관적으로 죄를 짓던 사람의 회개만큼 중요하고 숙고할 만한 가치가 있는 현상도 없다. 정말 그런 사람이 자기의 악한 길을 완전히 버리고 하나님을 예배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데서 기쁨을 찾는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이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만 그러한 효과를 관찰할 수 있음을 주목해야 할 것이고, 어떤 경우에는 한 장소에서 동시적으로 죄에서 거룩으로 회심하는 사람들이 많을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악한 사람들이 실제로 영구적인 개혁을 하는 것보다 복음의 신적 기원성과 능력을 더 강하게 증거하는 이적이 없다. 회의론자들더러 그러한 효과를 어느 것이든지 좋으니 자연의 원리를 따라서 설명해 보라고 도전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관점과 행사를 나타내는 사람이 초자연적인 작용에 의해서 그러한 결과를 만나게 되었음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러한 의문을 가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다른 영이 작용하는 것을 의식할 수 없음을 기꺼이 인정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의식이란 우리의 생각 밖에는 미치지 못하며, 또한 새로운 느낌이 우리 마음 속에서 일어난다 할지라도 그것을 추적하여 바른 원인을 찾아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우에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가 하나도 없다면, 그러한 효과들을 확신을 가지고 설명할 수 없었을 것이다.

 

 

말씀이 곧 변화의 확실한 정보를 안겨준다는 사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분명하고, 거듭해서 우리에게 정보를 제공한다. 곧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마음에 계속 작용하신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불의를 떠나게 하고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도록 계속 역사하신다. 그러한 효과들을 산출하기 위해 하나님이 지정하신 방편들을 사용했더니, 그러한 효과들이 일어났다면, 의심할 여지 없이 그 효력들을 하나님의 역사로 볼 수 있다. 가장 부패하고 저급한 이방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함으로 나타난 놀라운 변화를 주목하면 신적 작용의 교리를 믿는 믿음이 뚜렷이 확인된다.

 

지금 현재 살아있는 수천의 사람들이 경험한 그 성품상의 변화만으로도 불신앙적 선입견으로 강퍅해지지 않은 심령 속에 죄의 자각을 충분히 일으킬 수 있다. 어떤 사람은 반대입장을 나타내며, 변화되었다고 한 사람의 변화된 모습이 얼마 가지 못하여 사그라들고, 오늘 성도로 보이는 사람들이 내일에는 불의의 시궁창에 굴러 떨어져 있는 걸 보는 일이 많다고 주장할지 모른다. 우리도 그러한 사실들을 부인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들이 진정으로 일어난 영구적이고 철저한 변화의 사례들을 기초한 논증을 무산시켜 버린다고는 볼 수 없다.

 

종교적인 인상을 받은 백 명의 사람 가운데에서 참되고 진정한 회심과 변화를 체험한 자가 한 사람만이라도 있다면, 신적 감화를 편들어 내리는 결론은 견고할 것이다. 봄에 나무들을 보면 수로 헤아릴 수 없는 많은 꽃들이 만발해 있다. 그러나 그 꽃들은 성숙한 열매를 하나도 맺고 있지 않다. 그러나 가을이 되면 여기저기 사과라든지 크고 달콤한 과일을 볼 수 있다. 그런데도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는다고 믿기를 더디할 것인가?

아키발드 알렉산더, <영적체험, 회심에서 임종까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