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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ity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한 거듭남 체험의 경로

이 글은 1700년대에 살았던 목사 아키발드 알렉산더(Archibald Alexander)가 썼던 명저 <영적 체험, 회심에서 임종까지>에 나오는 글입니다. 그 자신도 오랜 세월 거듭남을 갈구했기 때문에 구도자가 거듭나기까지 느끼는 감정을 잘 알고 있고 그것이 그의 글에도 드러나 있습니다. 그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전기를 읽었기 때문에 훗날 거듭난 후에 여러 사람의 체험을 비교하고 분석한 글을 써서 거듭나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에게 큰 유익을 끼쳤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비록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다니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지만 교인들과 교제하고 봉사하면서 느끼는 만족감에 그쳐 죄의 문제나 거듭남의 필요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는 이들이 얼마 없습니다. 그래서 거듭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훌륭한 지침서가 될 이 책도 사람들에게서 잊혀져 가고 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여 이 글을 시작으로 이 책을 읽으면서 특별히 도움을 준 부분들을 조금 옮겨보려 합니다.

 

아래에 나오는 부분은 알렉산더 목사가 많은 그리스도인의 거듭남 체험을 읽으면서 발견한 거듭남의 공통적인 경로를 묘사한 것입니다. 마지막에 거듭나는 부분만 빼면 제가 겪었던 것과 너무도 비슷해서 마치 저자가 제 마음을 들여다본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여러분도 큰 위로와 도움을 받으시길 바랍니다.

 

빛이 더 밝으면 죄는 더 크게 , 더 잘 보여

 

어떤 사람들은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하면서 단순히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게 하면 그 죄는 더욱더 악해진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아무리 분명하고 강하다 할지라도 그러한 죄의 자각 소에는 중생을 시사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유도한다는 의미에서 그것을 이러한 변화의 예비적인 작용이라 말할 수는 없다. 그것이 낼 수 있는 오직 유일한 효과는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의 진정한 상태를 합리적으로 생각하게 하여, 자기에게 구세주가 절대로 필요함을 인식시켜주는 데 있다.

 

죄의 자각을 하면서도 하나님과 그 율법에 대한 반감이 더 뚜렷하게 나타나는 경우도 흔하다. 그러나 이러한 류의 느낌이 죄의 자각의 진수는 아니다. 또한 위험에 대해서 무서운 느낌을 가질 수도 있다. 무서운 생각이 강하게 일어나서 지옥이 마치 그 죄의 자각을 하는 죄인의 시야에 나타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공포감을 크게 가지고 있으면서도 죄에 대해서는 아주 조금밖에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 반면에 걱정스러운 상상력을 크게 발동시키지 않았으면서도 깊고 영구한 죄의 자각을 체험하는 사람도 흔히 있을 수 있다.

 

빛을 점진적으로 받을 때에 각성받은 양심은 처음에는 행실적으로 나쁘게 보이는 것을 고치려고 시도한다. 처음에는 그 양심이 외향으로 드러난 범법행위, 특히 어떤 두드러진 잘못에 대해서 크게 염려하는 것이 매우 보편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외면적인 개선의 시작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율법에 비추어서 죄를 깨달아도 양심은 그런 식으로 염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기도나 성경을 읽는 것이나 말씀을 듣는 것과 같은 외면적인 의무들에 주의를 기울인다. 그러나 율법적인 정신으로 그 모든 일을 대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과거의 잘못을 개선하려는 기대감을 가지고 그런 일에 접근한다는 말이다.

 

고통스런 고행을 해서라도 자기 죄가 속함 받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은 기꺼이 그러한 고행이라도 감수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받는 빛이 증가함에 따라서 자기 마음이 약하다는 걸 알기 시작하고, 바로 자기의 기도들이 바른 동기와 마음의 부족 때문에 오염되어 있음을 깨닫기 시작한다. 물론 그는 자기 생각을 통제하고 마음을 바로 쓰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여기서 자기의 그 노력이 아무 열매를 거두지 못함을 발견한다.

 

부패한 마음을 바른 상태로 개선하는 것보다 삶을 고치는 것이 훨씬 더 쉽다. 이제 자기는 절망적인 것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그 죄인은 소생할 방도를 알지 못하고 자기 고통의 절정을 극복할 방도를 모른다. 결국 수그러지지 않는 마음의 강퍅함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는 자기가 가진 것처럼 보이는 그 죄의 자각이 사라질까봐 겁이 나고 마음이 그대로 완전히 굳어져 버릴까봐 두렵다. 이러한 처지에서는 예리한 양심의 가책과 위압적인 공포를 느끼고 싶어한다. 왜냐하면 자각이 자기에게서 완전히 없어졌다는 인상을 받기 때문이다.

 

고뇌, 죄, 고민


자기 노력의 무위를 깊이 깨달아야 문제가 해결

 

그러나 알고보면, 자기가 그처럼 소원하는 그 예민한 비통감을 체험하지 않아도 그의 죄의 자각(죄 혐오감)은 훨씬 더 커져 있다. 이런 경우에 그는 자기 마음이 손을 댈 수 없을 정도로 악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 마음은 어떤 바랜 느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자기 마음에 모든 선한 정서와 모든 온유한 상냥함이 부족하다는 걸 알 뿐이다.

 

그는 이제 불의의 응어리에 관심을 두고, 자기 가슴 속에 모든 좋은 것에 무감각한 마음이 있음을 발견한다. 그는 다른 살마들이 어떤 선교자의 설교를 듣거나 어떤 책을 읽거나 어떤 체험있는 그리스도인과 대화를 나눔으로써 힘을 얻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하는가? 물론 그와 같은 방편들에 호소해 보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런 효과를 얻지 못한다. 오히려 채용된 방편의 탁월함에 비례하여 그 마음은 더욱더 무감각해지는 것 같다. 자기는 어떠한 유의 감수성도 없노라고 선언하지만 그의 걱정은 더해만 간다. 아마 그는 오로지 기도만 하고 성경만 읽기로 결심할 것이다. 만일 그러다가 죽는다면 긍휼을 구하면서 죽으리라. 그러나 그러한 결심이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별 소용이 없게 된다. 막상 기도하려고 하니 그 입이 열리지 않기 때문이다. 기도할 수 없고 또 성경을 읽을 수도 없으며, 묵상할 수도 없다. 그러면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아무것도 없다.

 

이제 그는 율법적인 노력에 종식을 고하게 된다. 그 결과는 간단하다. 자기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깊은 자각에 빠진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간섭해 주시지 않는다면 자기는 틀림없이 멸망당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하나님의 도움이 없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그는 자기 자신의 힘과 노력에 의지하는 걸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었다. 다만 어떠한 류의 노력과 느낌을 통해서 하나님의 긍휼을 받을 준비를 했으면 하고 희망했었다. 이제 그는 그러한 소망이 전혀 불가능함을 알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한동안 구원에 대해 아무 소망이 없는 것같이 느끼게 된다 - 그리하여 구원 문제에 대해서 생각을 포기해 버린다. 그렇다고 이러한 느낌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러한 느낌이 사실상의 체험으로 볼 때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지 비상한 것은 결코 아님을 안다. 그러나 죄의 자각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해보고 나면, 다시 말해서 자기를 위하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생각을 포기하고 극단의 종착점까지 나오게 되면 - 다시 말하면 절망의 변경에까지 이르게 되면, 하나님은 바로 그때 일하신다.

 

속담에 “사람의 속단은 하나님의 기회라”는 말이 있다. 이 경우가 바로 그러한 경우다. 아울러 인간이 자신에 대해 절망감을 느끼는 바로 그 순간에 거듭나게 하시는 일을 하신다고 생각하는 것도 이치에 맞을 수 있다. 왜냐하면 이제 느낌의 새로운 상태를 체험하기 때문이다. 조용하게 생각해 보면 하나님의 모든 경륜은 의롭고 선하였다는 느낌이 든다. 그 영혼은 자기야말로 멸망에 합당한 존재임을 생각하여 자기의 비참한 상태를 인정하고, 하나님께는 아무런 잘못이 없음을 안 것이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의로우시다 하고 판단하실 때에 순전하시다 하리이다”(시 51:4)

 

죄인은 이제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맡긴다. 그러면서도 자기가 멸망한다면 마땅히 받을 자기의 죄 때문에 당하는 일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하나님께서 자신도 의로우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경건치 않은 자들도 의롭다 하시려는 영광스러운 계획을 충분히 파악해 내지는 못한 상태이다.


 거듭남


절망의 터널 끝에 드디어 은혜의 손길이

 

위에서 지적한 것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겪은 체험 이야기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많은 사람들이 체험하는 매우 공통적인 경로이다. 율법적인 죄의 자각을 중생 이전에 와야하는 필수적인 것으로 생각지는 않지만 중생으로 말미암아 초기에 그러한 진지한 인상들을 받게 된 경우들이 있음을 상정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율법 아래서 겪는 어떤 특별한 체험의 경로는 진수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다. 어쨌든 율법적 죄의식은 중생하기 전에 일어나는 가장 보편적인 체험임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죄인이 어째서 그렇게 각성받느냐는 질문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것인가? 그런 질문을 던지는 데 어떤 좋은 목적이라도 있는가? 이에 대해 부분적으로라도 대답한 셈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리를 따질 수 있고 도덕적인 존재로 사람을 대하시는 걸 지적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파멸에서 사람을 구출해 내시기 전에, 어느 정도는 사람이 곤고한 조건과, 무능한 상태와, 죄와 비참에서 자신을 건지려는 그 어떤 노력도 아무 효력이 없음을 알고 느끼게 하실 것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지혜와 힘을 써보도록 허락하신다.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책을 온전히 인정하고 의로우신 재판장, 곧 자기를 영원한 고통에 빠질 자로 정죄하시는 하나님의 정당성을 인정하도록 인도하실 계획을 갖고 계시다. 그러니 죄의 자각이 결코 구원의 부분은 될 수 없지만, 자기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다만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은혜에만 달려 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실질적으로 아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