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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ity

일시적인 감정의 변화를 회심으로 간주하는 위험

오늘날의 교회에서 빈번하게 벌어지는 일이 있습니다. 부흥회나 수련회 기간 동안에는 활활 타오를 것처럼 뜨거워지고 홍수 같은 눈물을 쏟던 사람들이 일상생활로 돌아가자마자 대리석처럼 차갑게 식어버리는 일이 바로 그것입니다. 알렉산더 목사의 다음 글을 읽어보면 이런 냄비근성이 교회에 침투한 것은 그리 최근이 아닌가 봅니다. 화려한 언변이나 교묘한 장치로 사람들을 격동시켜 그들이 스스로 회심했다고 믿도록 만드는 일이 1700년대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인위적으로 발생시킨 흥분과 성령이 부어주시는 참된 은혜를 구분하지 못해 속기 쉬운 양들을 어떻게 해야 올바른 문으로 인도할 수 있을지에 대한 알렉산더 목사의 고민과 통찰을 배울 수 있는 글입니다.

 

집단 흥분에서 받는 가책이 과연 진정한 회개인가

 

그러나 부흥의 시기에서나 각성의 역사가 보편적으로 일어날 때 이 원리의 힘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다. 사람들의 공명심이 크게 깨어난다든지, 다른 사람들의 감동받은 모습을 보고 진지하게 되는 사람들이 많은 걸 보고 진정한 역사가 아니라고 일축해버려서는 결코 안 된다. 하나님께서는 흔히 이러한 본능적인 감정을 바로 이러한 방식으로 축복하기도 하신다. 그러나 그러한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저 단순한 공명에 의해서 움직일 것을 예기하지 말아야겠는가? 공명의 원리 때문에 부드러운 정서를 나타내 보이는 것을 참으로 회개한 것이라 단정지음으로써 그런 식의 모습을 나타내는 사람들이 크게 속을 위험이 없을까? 특히 복음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체험하는 양심의 가책 정도에 불과한 걸 가지고 참된 회심으로 단정하면 그러한 위험에 빠지지 않을까?

 

우리 본성의 고명심을 때리는 감격적 설교를 통하여 감정에 빠지기 쉬운 부류들을 격발시키는 것이 분별 있는 일인가? 젊고 무식한 사람들의 감정을 흥분시킬 ‘방도’를 꾸며내는 것도 잘하는 일인가? 전체 회중에 강력한 감화력을 끼치는 방편이라면 사용될 수도 있음을 기꺼이 인정한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야기된 흥분이 쓸모 있는 것일까? 그러한 방편을 사용하면 자신감 없어 하는 젊은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의 결심을 내리게 할 수는 있을지 모른다. 말하자면 억지로 주님 편에 서게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나에게 걸리는 문제는, 이러한 것이 정말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가 하는 것이다. 나의 판단으로는 유익하게 하기는커녕 오히려 그 정반대일 것이다. 만일 그들이 은혜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면, 천천히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지라도 이 씨앗은 빛과 공기를 만나면 제 길을 찾을 것이고, 늦게 싹이 틈으로 인해서 땅 속에 깊이 뿌리박을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만일 자기 영혼의 구원문제로 심각해진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 놓은 ‘좌석’에 나가 앉거나, 아니면 전회중들 앞에서 기도를 받기 위해 무릎을 꿇어야 한다면, 나도 이상하게 감격이 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어떤 영구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믿지는 않는다. 만일 그런 방법으로 해서 어떤 좋은 효과를 산출 ’해야’ 한다면, 하나님을 예배할 때 유용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다 동원할 권한이 내게 있는가? 만일 그러한 일들이 합법적이고 유용하다면, 어째서 다른 조건들을 부연하여 효과를 증가시키지 않아야 할까?

 

그러면 어째서 죄를 회개하는 사람더러 흰옷을 입고 나오라든지 아니면 머리에 재를 뒤집어쓰고 베옷을 입고 나오라고 요구하지 않는가? 이러한 것들은 겸손을 나타내는 성경적 표증임을 기억하라. 이러한 원리들대로 한다면 하나님을 예배할 때 성수(聖水)를 뿌리거나, 향을 피우거나, 그림이나 조상(彫像)을 사용하는걸 누가 과연 반대할 수 있는가? 같은 원리대로 한다면 이러한 모든 것들을 교회로 받아들여 선을 이루기 위한 ‘새로운 방편’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부흥회 때의 급작스런 뜨거움이 참으로 유익한가

 

만일 영혼구원에 관하여 염려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좌석’을 만들어 놓는다고 해서 은혜받는 데 강력한 효력을 얻는다면, 그것은 금방 교회의 성례(聖禮)로 인정받을 수 있을지 모른다. 우리의 체험상, 종교적인 인상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공중 앞에 너무 드러내는 것이 안전하지도 못하고 지혜롭지도 못하다. 자연의 식물의 씨처럼 말씀의 씨앗도 태양 빛을 받는다고 해서 금방 쑥쑥 자라는 건 아니다. 은혜의 나무가 빨리 성숙해지지 않는다고 너무 조급해서는 안 된다. 물을 주고 가꾸되 아무렇게나 다루어서는 안 된다.

 

부흥의 시기에 신앙을 갖게 된 경우는 다 믿을만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선한 사람들이 있는데, 그러한 견해는 어떤 정당한 근거가 있는 건 아니다. 성령께서 진실로 부어지는 그러한 때에 회심자들의 관점이나 행사가 그렇지 못한 때보다 더 분명하고 만족스러운 게 사실이다. 그리고 회심의 과정도 보다 급속하다. 그러나 외면적인 회심의 모습을 보이면서도 그렇지 못한 상당한 경우가 있음을 감안해야 함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 류에 속한 사람들이 외모적으로 가장 대단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다른 어느 경우보다 돌짝밭에서 훨씬 더 빨리 쑥쑥 자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모든 부흥회 기간이 끝나고 나서 그렇게 좋게만 보이던 국면에 서글픈 퇴조현상이 나타나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뿌리가 전혀 없는 것은 금방 말라져버린다. 부흥의 기간을 되돌아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만일 그때 나중까지 끝까지 견뎌 열매를 맺는 사람들만이 교회 좌석 앞으로 나왔더라면 문제는 어떻게 되었을까? 아마 일이 너무 조용하게 진행되므로 그 좋은 역사를 ‘부흥’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목사들은 단순히 공명의 원리에서 야기되는 인상을 막을 수가 없다 - 또 그러한 인상을 내기 위해 억지도 부리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곡식더미를 성실하게 키질해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목사들이 사람들의 심령을 분별할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은 마음의 생각과 계획을 드러낸다는 말이다.

 

교회는 회심하지 않은 사람들을 위한 도피처가 아니다. 수천 수백의 사람들이 외면적인 신앙고백과 교회의 상황을 의존하여 진정한 죄의 자각을 하지 못하고들 있다. 목사들은 ‘뱀처럼 지혜로울 뿐 아니라, 비둘기처럼 순결해야 한다.’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디다스카로이)이 되지 말라”(약 3:1).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會計)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히 13:17) - 무섭게 회계해야 한다!

 

아키발드 알렉산더, <영적체험, 회심에서 임종까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