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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ity

아이 같은 새사람에게 주의 비밀이 함께 해

학자가 연구를 하듯이 구원을 구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습니다. 탁월한 지성을 갖춘 사람들이 특히 그러한 모습을 보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성경을 면밀하게 읽으면서 구절들을 대조해보고 역사적인 사실들을 되짚어보고 다양한 책을 통해 기독교에 대한 지식들을 쌓는 과정을 계속합니다. 물론 이렇게 하는 것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닐 뿐만 아니라 오히려 권장될 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마치 영지주의자들처럼 기독교에 대한 지식을 배움으로써 거듭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거듭나기를 바라는 영혼에게 필요한 것은 ‘어린아이 같은 마음’입니다. 연구대상을 바라보는 과학자의 시선이 아니라 구세주를 바라는 죄인의 시선으로 바랄 때 하나님은 자신의 경륜을 드러내십니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알렉산더 목사의 글입니다.

 

눈물이 흘러넘칠 때 그는 기뻐서 우는지 슬퍼서 우는지 스스로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기뻐서도 울고 슬퍼서도 운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거룩한 행사에 있어서, 서로 상반되는 정서들이 아름답게 얽혀 있다. 본질적으로 서로 상반되는 이러한 정서들이 서로 아름답게 섞이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그 사람은 단 것이나 쓴 것이나, 서로 함께 있는 것인지 구별되어 있는 것인지 가름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영혼이 그처럼 고양되어 있고, 그처럼 비하되어 있을 때 - 그러니 그렇게 기쁘고, 또 슬픔 상태를 유지하면서 - 십자가 아래서 보낸 한 시간은 세상의 즐거움을 누린 천 시간보다 더 낫다.

 

번연(J. Bunyan)의 천로역정에서 주인공 ‘그리스도인’이 좁은 문으로 들어갈 때 짐을 즉시 벗지 않았다. 오히려 순례길을 행하면서 십자가를 볼 때에 그 짐을 벗었던 것이다. 그때 그 순간에, 그 등을 매고 있던 그 끈들, 아무도 끊을 수 없는 그 끈들이 끊어지고, 그의 짐은 부려지며 다시 그에게 지워지지 않는다. 물론 그가 거기 절망의 감옥에 그처럼 오래 있었지만 말이다. 새로워진 마음의 느낌들은 이제 후로는 율법적 의미에서 죄를 깨달았던 것과 전혀 같지 않다. 살아 있는 그리스도인의 체험 속에는 세상의 지혜로운 사람이 전혀 꿈꾸지 못하는 장면들이 있다. 아마 세상의 지혜로운 사람들이 그 장면에 대한 것을 듣게 되면 믿지 않을 것이다. 이러한 것들이 지혜롭고 총명한 사람들에게는 숨겨졌지만 어린 아이들에게는 밝혀진다.

 

 

주님의 비밀이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다. 방황하다가 감독되시고 목자되신 분에게 돌아온 영혼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 가장 강력한 의무감을 느낀다 - 자신을 부인하며 세상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그 하나님의 아들의 영예를 위해서 어떤 일이든지, 어떤 고난이든지 무릅써야 한다는 가장 강력한 당위감을 느낀다. 그래서 새 생활이 시작된다 - 새로운 심령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그 ‘새 사람’은 아직도 무지하고 불안전한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면밀히 주목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기가 예수와 함께 있다는 뚜렷한 증거를 나타내 보이고, 성령으로 세례를 받은 증거를 나타낸다.

 

이러한 깨달음과 행사들이 자주 번복되면 될수록, 영적이고 천성적인 삶의 모습을 더 많이 드러내게 된다. 이 사람은 감추어질 수 없는 등불이요, 완전한 그 날을 향하여 더 많은 것을 밝혀줌에 틀림없는 등불이다. 사도 유다가 한 권고를 여기서 들어보라.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는 너희의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기를 건축하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기를 지키며, 영생에 이르도록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20절).

 

아키발드 알렉산더, <영적 체험, 회심에서 임종까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