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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ity

R과 C의 거듭남 체험

아래의 글은 알렉산더 목사가 어떤 그리스도인이 경험했던 거듭남의 체험을 기록한 것입니다. 이 사람이 비록 구원의 여정 속에서 이리저리 비틀거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 가지 잘한 점이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것은 바로 ‘자신의 거듭남 여부를 자신의 느낌으로 결정짓지 않고 죄로부터 벗어났는지를 기준으로 살핀 점’입니다. 교회에 다니는 분들도 예수님이 우리를 ‘지옥’으로부터 구원해주기 위해서 죽으셨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죽음이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이라고 증거합니다(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마 1:21).

 

R과 C(사람 이름인 것 같습니다 - 블로거 주)라는 그리스도인의 체험의 진술로부터 뽑아낸 몇 가지 요점은, 우리가 이제까지 다루어 온 요점들을 실증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특히 진리를 아는 지식에 이르는 데 있어서 어떤 사람들이 나타내 보이는 점진적인 자세와, 많은 경우에서 보통은혜가 끝나고 특별은혜가 시작되는 지점이 어딘지를 알아내는 것이 극히 어렵다는 것을 예증하는 데 기여할 것이다.

 

     기독교는 조상의 종교였기에 다만 친숙했을 뿐

진술자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성인이 될 때까지 종교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고 보아야 한다. 어떤 동료나 친척의 죽음을 보고 가끔가다 마음의 경성(警省)을 느낀 것 외에는 어떤 진지한 인상을 체험한 적도 없었다. 쾌락과 유흥의 삶을 언짢게 생각하게 만드는 엄격한 종교에 대한 큰 혐오감을 습관적으로 길러오면서, 일반적으로 기독교에 대하여 강한 선입견을 가졌었는데, 특히 내 부모들과 조상들이 속해 있던 교단에 대하여 더욱 그러하였다. 내가 이것을 선입관이라 부르는 이유가 있다. 나는 기독교의 진리에 대한 여러 증거들에 대해서 하나도 알고 있지 못했었고,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매우 희미하고 혼돈된 개념밖에는 갖고 있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러한 면에 속한 것을 가지고 있었다면 어린 시절에 성경의 역사적인 부분을 여러 군데 자주 읽어보았다는 사실 뿐이다.

 

나는 이러한 마음의 상태를 가지고 불신앙자들의 일반적인 반대논리를 접하게 되었다. 역사를 읽는 가운데서 그러한 입장을 접하게 되었는데, 모든 나라들이 그 나름의 종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모든 민족들이 우리가 기독교에서 믿는 바와 같은 그러한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래서 ‘어째서 우리는 옳고 그들은 틀려야만 하는가?’라는 의문이 자주 일어났다. 그러나 이 당시에는 불신앙적인 정신이 사회에 만연되었고, 그것을 주창하는 자들이 자기들의 견해를 담대하게 선포하였다. 내 생각은 기독교를 좋아하는 편으로 기울어지기에는 너무나도 철저하게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내가 붙잡고 있었던 오직 한 가지 요점은, 기독교란 내 조상적부터 전수되어 내려온 신앙이라는 것 뿐이었다. 또한 내가 친숙해 있는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기독교를 믿어왔다는 사실 밖에는 내게 남은 것이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이 내 마음을 만족시킬 리 없었다.

 

나는 우리가 다 믿음에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두려움 때문에 불안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러한 생각이 내 마음을 기쁘게 하지는 못했다. 기독교 진리를 증거하는 책들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그러한 책들이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도 없다. 또한 내가 가르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전혀 만나지 못하는 그러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다만 문학적인 문제로 의견을 교환할 오직 유일한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한 신사였다. 그 사람은 그 주제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았지만 회의론적인 관점으로 깊이 젖어 있는 사람이었다. 어릴 때에 친구들로부터 떠나 어떤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혼자 동떨어져 있는 상황에서 친구를 거의 사귈 수가 없었다. 그리고 교훈적인 설교를 들을 기회도 거의 갖지 못했었다. 나는 그러한 상황에서 내 자신의 생각만을 붙들고 있었고, 나 자신을 반성하면서 몹시 언짢아했던 적이 자주 있었다.

 

     한 권의 책에서 잡은 우연한 계기

어느 날 - 그 날은 주일이었다 - 내 트렁크 속에 넣어 둔 몇 권의 책을 살펴보다가 <기독교의 내적 증거>(Internal Evidences of the Christian Religion)라고 쓰여진 책에 눈이 가게 됐다. 나는 가끔 거 책을 본 적이 있었지만, 그 책의 주제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현재 내가 빠져 있는 어려운 상황에서 나는 그 책을 얼른 붙잡았고, 읽기 시작했다. 그 책은 소움 제닌스(Some Jenyns)라는 사람의 훌륭한 저작이었다. 나는 그 책을 다 읽기 전에는 내가 앉은 자리를 바꾸지 않았다. 내가 그 책을 일어나가는 중에, 증거의 빛이 참으로 놀라운 힘으로 내 마음에 부어졌다. 그래서 읽기를 끝마쳤을 때는 내가 앉아 있는 방이 찬란한 빛으로 충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와 같은 당혹한 처지에서 진리를 깊이 묵상하게끔 된 사람들 외에는 아무도 맛볼 수 없는 그러한 즐거움을 느꼈다. 내 의심이 사라졌을 뿐만 아니라 내게는 더 이상 기독교에 대한 증거가 필요 없게 되었다. 기독교 진리에 대한 내 확신은 철저한 것이었다. 나는 그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아직도 나는 복음 안에 계시된 구원의 방식에 속한 어느 것에 대해서도 잘 아는 것이 없었다. 나는 무지한 수천의 사람들이 가진 보통의 그럴듯한 생각만을 가지고 있었다. ‘좋은 때가 되면 좋아지겠지’ 라는 생가 뿐이었다. 그러면서 한 순간도 내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할 능력이 내게 있다는 사실을 의심해 보지 않았었다. 내게 불안감을 주는 오직 한 가지 일이 있다면, 내가 갑작스럽게 죽으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이었다. 갑작스럽게 죽는다면 회개하고 하나님과 화평을 이룰 기회가 없지 않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왔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죽지 않고 어느 기간을 두고 죽을 것이라는 소망이 내게 들어왔고, 그 소망이 내 의식 속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 다음에 내가 하늘나라에 가기 위해 필요한 모든 충분한 준비를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면서도 그 준비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한 분명한 생각도 갖고 있지 않았다. 이러한 기간을 거치면서 나는 몇 가지 시험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몇 가지 죄가 나를 억누르고 있었다. 어느 날 어떤 어린이가 내게 작은 책을 가져다 주면서, T 부인이 이 책을 읽고 곧 되돌려 달라고 하더라는 말을 전해 주었다.

 

 

그 책은 징크스라는 사람이 쓴 <하나님의 의(義)에의 복종>(Submission to the Righteousness of God)이라는 책이었다. 나는 그 책을 앉은 자리에서 다 읽어버렸다. 그리고 다시 새로운 빛이 내 마음 속에 일렁거렸다. 그 책의 저자는 서론에서, 자신은 설교자로 몇 년 동안 행세하면서도 죄인이 의롭다하심을 받는 참된 방식에 대해서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었다. 그는 영국 교회의 한 목사였다. 나는 이제 그 사람과 똑같이 이제까지 살아오는 동안 구원의 방식에 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했었다는 걸 발견했다. 나는 통상적이고 비성경적인 개념을 붙잡고 있는데, 그 책의 저자는 그것이 전혀 그릇된 것임을 밝혀 주었다.

 

     체험자들과의 대화가 관심을 촉진시켜

이러한 새로운 관점이 단순히 이지적인 것에 지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내게 큰 만족을 주었다. 나는 이제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 것에 관하여 복음이 지시하는 방식을 분명히 알게 되었다. 나는 그 이후로 그 지식을 꼭 붙잡았다. 나는 내가 읽은 그 책을 다른 곳에서 발견한 적이 없었다.

 

내가 접한 설교는 거의 거칠고도 환상주의적인 것이었고, ‘새로(거듭)남’을 묘사하는 설교를 들었을 경우에도 그 방식은 중생의 교리에 대하여 잘못된 선입관을 갖도록 하는 것이었다. 나는 이 변화에 관해서 전에는 아무것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매우 선하고 종교적인 사람 몇몇을 알았다는 걸 확신했다. 진지하고 지성적인 그리스도인들이 이 교리를 믿는지 알고 싶어 마음에 괴로움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것은 역시 내가 알고 있는 어떤 작은 부류 가운데서 토론의 주제가 되었다. 그리고 그 부류 가운에 있는 한 사람이 이 변화를 체험 했었다는 고백을 하는 걸 들었다. 또 다른 사람들이 정말 그러한 변화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기는 아직도 그러한 변화를 체험한 것이 아니고 그걸 추구하고 있을 뿐이라고 고백하였다.

 

세 번째 사람은 그것이 유대인들이나 전혀 교회에 나와보지 않은 사람들의 회개를 가리키는 것이라는 견해를 밝혔다. 그 사람은 세례 받는 그 자체가 중생(重生)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네 번째 사람은 이미 언급된 바 있는 그 회의적인 신사였는데, 전체 문제에 대해서 회의적인 자세를 가지고 있었다. 나는 어렸고 아무것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 대화에 끼어들지는 못했었다. 다만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들이 하는 이야기를 청종하였다. 나는 다시 그와 같은 부류의 책들을 접해 보았다. 그러나 만족한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다. 내가 아는 종교적인 서적의 범주란 매우 협소한 것이었고, 그 책들 중 복음적인 냄새를 풍기는 것은 거의 없었다. 회심을 고백한, 내가 알고 있는 그 사람은 어느 날 어둠에서 빛으로 나아오게 된 여러 단계와, 또한 그 가운데서 체험한 여러 변화들을 말해 주었다. 내가 그 사람의 정직성과 진지함에 대하여 좋은 느낌을 가졌기 때문에 그 사람이 말하는 것에는 무엇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어떤 주목할 만한 변화를 체험하지는 못했었지만 종교의 주제가 내게 더욱이 자주 떠올랐고, 전보다 내 마음 속에서 더 깊은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 한 가지 증거로, 은밀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다. 가족 중에 누가 대단히 위험한 질병을 앓고 있을 경우 외에는 지금까지 전혀 태만히 여겼던 일이었다. 나는 나 혼자 있을 호젓한 곳을 선택하였다. 그곳은 나무와 잡풀이 빽빽이 들어서 자라고 있는 어느 개천 뚝이었다. 나는 푸른 풀을 얼기설기 깔아놓고 어설프나마 앉을 자리를 만들었다. 여름날 밤마다 나는, 이 동떨어져 있는 나 혼자밖에 모르는 곳으로 오기로 마음먹었다.

 

     감동적 눈물 끝에 변화 느꼈으나 이튿날 또 달라져

그런데 어느 주일날 오후였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를 더디하는 죄인들을 오래 참고 기다리시며 인내하시는 하나님에 관한 설교를 읽고 있었다. 그 설교에서 말하는 많은 요점들이 내 자신의 경우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 나를 감동시키시고 나를 그처럼 오래 기다리신 하나님의 선하심과 오래 참으심에 대한 생각으로 얼마나 크게 감동받았는지 모른다. 내가 그처럼 하나님에 대해서 무관심하게 살았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나는 밖으로 나가 울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는 심정에 빠졌다. 나는 가족들의 요청에 따라서 큰 소리로 그 설교를 읽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 책을 황급히 놓고 내 은둔처로 달려갔다. 거기서 나는 홍수처럼 쏟아지는 눈물을 머금고 기도를 드렸다. 갑자기 나는 기쁨의 홍수로 압도당했다. 도저히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환희에 찬 것이었다. 종교가 필요한 것이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그 종교를 실제화했을 때 이처럼 즐거운 일이 있다는 것은 미처 생각하지도 못했었다. 어디서 이러한 기쁨이 왔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내 심상을 때린 한 가지가 있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내하심, 그리고 내 자신의 배은망덕이었다. 나는 그러한 흘러넘치는 기쁨이 얼마나 오랫동안 계속 됐는지 지금도 말할 수가 없다. 그러나 거기서 얻은 인상은 내가 하나님의 은총을 받고 있으며, 나는 영원토록 틀림없이 행복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게 하였다. 이러한 격정적인 느낌이 가라앉았을 때 이것이 바로 회심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 그것은 참 위대한 변화다. 최근에까지 그처럼 많이 들어 왔던 바로 그 위대한 변화임에 틀림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가면서, 만일 이것이 ‘거듭남’이라 불리우는 변화라면 내 모든 죄를 버리는 일을 통해서 이 일이 입증될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이 생각은 옳은 것 같았고, 정말 내가 거듭 났는지를 시험해 보겠다는 결심을 하였다. 나는 그날 밤새도록 기쁨에 찬 평온을 누렸다. 그러나 다음날 아침 내 느낌은 옛날의 상태로 되돌아와 있었다. 나는 이것을 슬퍼했고, 내가 그처럼 기쁨에 찬 불꽃을 체험했던 그곳으로 갔다. 나는 그곳에 가면서 어떠한 연상법을 통해서 같은 장면이 내게 나타날 것이라는 소망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곳은 여전히 같은 곳이었고, 어제 내가 생각했던 것과 똑같은 걸 생각했지만, 내 영혼을 송두리째 사로잡는 그러한 정황은 나타나지 않았다. 어떤 기도도 해보고 한동안 시간을 끌어보기도 하였다. 그러나 내가 찾고 바라던 것은 전혀 다시 만나지 모했다.

 

내가 정해 놓은 시금석의 수준에서 떨어진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경과하지 않은 때였다. 나를 거쳐 넘어져가는 죄에 빠지는 일이 여전히 내게 남아 있었다. 그걸 저항할 힘도 없었고 그러한 시험을 받으면 대번에 넘어졌다. 이러한 실패는 나로 하여금 말로 할 수 없는 고통을 주었던 것이 지금도 생각난다. 내 마음 속에서 품었던 상황이 좌절되기까지 그 소망에 대한 나의 애정이 얼마나 깊었는지 모른다. 내가 그 소망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느끼는 회의감은 내가 그 어느 것을 잃었을 때보다도 더 예리하였다.

 

     믿음으로 의롭다함 입는다는 놀랍고도 평범한 사실

내가 중생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종교의 주제에 대한 내 관점과 느낌에 상당한 변화를 의식하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중생의 필요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또한 그 중생이 어떠한 관계를 가져와야 된다는 것에 대하여 일관성 있는 개념들을 가지고 있었다. 앞에서 진술한 바와 같이 죄인이 의롭다함을 받는 방식에 대한 복음적인 관점을 얻게 되었고, 종교적인 사람들에 대해 이전에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이전에는 종교적인 사람들을 보면 나는 무서울 정도로 반감이 일어났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진지한 존경심을 느꼈다. 그리고 내 친구 중 어느 사람이 신앙적인 사람이 되었다든지, 아니면 그전보다 더 진지해졌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기뻤다. 어떤 유능한 목사가 ‘우리의 의는 더러운 옷과 같다’는 본문을 주제로 삼아 행한 복음적인 설교를 들을 기회를 가졌다. 강단에서 유별나도록 힘있게 설교하는 그 설교자가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교리를 설교할 때 나는 얼마나 큰 기쁨을 느꼈는지 다 말할 수 없다. 나는 그 교리를 온전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내가 거기에 모여 있는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았을 때 설교자가 무엇을 말하는지 하나도 알고 있지 못한 것처럼 느꼈다. 그들은 여전히 자기 자신의 행위를 의뢰하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받았다. 또한 기독교의 여러 교리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내게는 즐거웠다. 그리고 사악한 길로 나가는 것이 정말 역겨웠다.

 

한동안 강력한 역사가 있었던 부흥회가 진행되는 곳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통하여 나는 그러한 마음의 상태를 내 몫으로 받게 되었다. 나는 이와 유사한 것을 떠들썩하고 환상주의적인 종파에서 목격한 적이 있었다. 거기 있는 사람들은 몸을 심하게 흔들며 격렬한 몸짓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다른 장면이었다. 집회를 이끌어 나가면서 설교를 하는 사람은 학식 있고 웅변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내가 생각하기로는, 체험적 종교에 대한 그의 관점이 매우 바르고 성경적이었다. 그에게 잘못된 것이 있었다면, 너무 안전한 편으로 치우쳐서 종교적인 인상을 깊이 받은 얼마간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철저한 회심을 하지 않은 것으로 믿는다는 데 있었다. 나는 이러한 장면에 몰입되면서 여러 가지 새로운 갈등을 일으키는 느낌을 체험하였다.

 

 

내가 보는 앞에서, 금방 회심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죄의 자각과 회심에 대해서 거침없이 말했다. 그러나 그러한 일에서 그들은 나를 깜짝 놀라게 할 정도의 경박함을 자주 나타내 보였다. 나는 그들이 하는 이야기에 끼어들 수 없었다. 물론 내가 가진 보편적인 목적은 내 자신이 각성받지 못했고 회심하지 못한 죄인으로 여기려는 것이었지만, 참된 종교의 표지들로 제시하는 것을 들을 때, 앞에서 언급한 그 뛰어난 설교자가 그러한 표지들을 들어 말하는 걸 들었을 때, ‘이것이 종교라면 너는 틀림없이 그것을 체험했다’는 생각이 내 마음 속에서 끊임없이 일어났다. 나는 그러한 생각이 떠오를 때 그것은 나로 하여금 죄의 깨달음을 갖지 못하도록 원수가 거짓된 소망을 불어 넣는 것으로 생각되었다. 아직까지 계속해서 그러한 생각이 내 마음 속에 있었고, 그것이 진실인 것처럼 느껴졌다.

 

     체험을 억지로 하려다 얻는 갈등들

나는 위에서 언급한 문제를 가지고 교구목사에게 말할 기회를 가졌었다. 그리고 그 목사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자마자 얼른 그것을 토로했다. 왜냐하면, 나는 자신감이 없었고 소심하였으며, 내 경우를 다른 사람에게 자유롭게 토로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교구목사를 만나서 앞에서 언급했던 내 자신의 종교적인 모든 상황들을 다 말하였다. 특히 그러한 종교적인 행사들이 내가 탐닉했던 죄의 습관을 끊기에는 부족하였다는 걸 진술하였다. 내가 이 부분을 언급하자마자 그 교구목사는 단호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그러면 분명히 당신의 종교적인 행사들이라는 것은 참된 본질에 속한 것이 아닙니다. 당신은 더 나은 소망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로 영입됨을 허락 받지 못할 것입니다.’ 이 결정적인 대답을 듣는 순간부터 내가 은혜의 상태에 있다는 모든 생각을 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내 자신이 거짓된 소망을 갖도록 하는 사단의 시험을 받고 있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 생각에서 벗어나는 듯한 느낌을 가졌다.

 

그리고 이제는 회심보다, 먼저 ‘죄의 각성’이 필요함을 생각하고 그것을 구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내가 들었던 모든 설교가 내 영혼 속에 죄의 무서움을 깨우치는 방편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했다. 각성을 주는 강론들은 거의 다 읽었고, 무서운 심판을 당하여 저주받은 상태에서 고통을 당하는 걸 생각하면서 내 마음을 자극해 보려고 애쓰기도 하였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서 불못을 목격하기 위해서 무저갱의 덮개를 열어 보려고 애썼고, 저주받은 사람들의 울부짖는 소리를 들어 보려고도 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죄에 대한 생각으로 무서운 느낌을 가지려 하면 할수록, 그러한 느낌들은 나에게서 더 멀리 도망가는 것 같았다. 내 마음은 날마다 더 강퍅해져 가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무감각한 것 외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였다. 나는 절망하게 되었다. 부흥이 일어나는 현장에서 내가 떠나가야 된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사람들 속에서 종교에 대한 관심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는 곳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들었다. 그러면서 거기에 가면 냉랭하고 생명 없는 설교를 들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나는 그곳으로 떠나기에 앞서 하루 종일 은밀하고 엄숙한 생각을 하며 내 애처롭고 소망 없는 경우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여 가지신 모든 자비로운 경륜을 다 팽개치고, 내가 최근에 누렸던 은혜의 많은 보배로운 방편들을 생각하면서 그 모든 것이 소용없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주께 맡겨야겠다는 생각이 결정적 열쇠

이제 내가 마음으로 내려야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결론은, 하나님께서 나를 강퍅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었으며, 나는 결단코 참된 신앙을 가질 정도로 행복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생각할 때 이 결론은 너무나도 확실한 것처럼 보였다. 나를 정죄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 내 마음 속에 그 진리처럼 보다 더 선명하게 나타나 보이는 진리는 없었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를 지옥에 보내도 하나님이 온전히 정당하다는 걸 인정했다. 그 일은 옳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 같은 사람을 지옥에 보내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님이 의로우실 수 있는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의롭고 필요한 일로 묵묵히 받아들이는 것 같은 자세를 취했다.’ 바로 이 순간에, 내 마음은 이전의 오랜 기간 동안 겪었던 것보다 더 평온을 되찾게 되었다.

 

내 편에서 애쓰고 노력하던 모든 것은 이제 끝났고, 그 나무들이 많은 곳에서 있으면서 이때야말로 집으로 돌아갈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가면 몇 사람의 친구들을 만날 것 같았다. 여기서 나는 나를 기다리는 목사 한 분을 만났다. 그분을 한 번 본 적은 있지만 말을 나눈 적은 없었다. 그는 나를 한쪽으로 불러 세우더니 내가 누린 많은 특권들을 열거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내가 어떤 훌륭한 인상을 받았었다는 소감을 피력했다. 나는 그 목사에게 그것은 사실이며 정말 나는 크게 은총을 입었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영원히 버림받은 것이 틀림없다는 확실한 결론에 도달해 있다고 말해 주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모든 방편들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죄의 혐오감에 대한 감각을 얻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러면서 그러한 죄의 깨달음이 없이는 내 회심은 불가능하다고 토로했다.

 

그 사람은 내 말을 듣더니 이렇게 대꾸했다. ‘죄의 각성이란 조금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가 될 필요성을 느끼게 하는 방편에 불과할 뿐입니다. 내가 구주를 필요로 하고 있는 입장에 서 있다는 걸 느끼지 못하는지를 알려주는 방편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계속 이렇게 말해 나갔다. ‘그리스도는 하나님 우편에 있는 대변인으로서, 자기의 손에 맡겨진 어떠한 경우도 받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당신의 경우가 아무리 절망적으로 보인다 할지라도, 그 부에게 맡기기만 하면 그분은 당신을 완전하게 맡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자기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오는 모든 사람을 한 사람도 빠짐 없이 다 구원할 수 있으시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안목이 내 마음 속에 찾아들었다. 나는 그리스도께서 ‘나 같은 사람마저’ 구원하실 수 있다는 걸 알았다. 나는 내 문제를 그리스도의 손에 의탁시켜야겠다는 기꺼운 느낌이 들었다. 구원에 대한 확실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것은 내가 체험한 것 중에서 가장 놀라운 해방이었다. 나는 이 진리에 대한 관점을 가지고 크게 감동을 받았다. 정말 말로 다 할 수 없는 감격이었다.

 

     용서와 열납됨은 전적으로 그분의 은혜

이제 내 황폐한 영혼 속에서 소망이 끓어 올랐다 - 내가 용서받았다거나 하나님께 열납되었다거나 그러한 생각이 일어난 것은 아니다 - 다만 나도 이 후에 용서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식하게 된 것이다. 나는 죄 용서함과 하나님께 열납되는 축복을 받기 전에는 결코 그만 두지 않겠다는 결연한 자세를 가지게 되었다. 그날 밤새 내 마음은 정말 아름답게 평온을 되찾았고, 하나님 말씀의 보배로운 약속과 선언들이 내 생각 속에 연이어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러한 체험을 하기 전에는, 구원에 대한 확실한 기대감이 그러한 위안을 가져오리라고는 믿지 않았었다.

 

 

이때 쯤에서, 아마 그 다음 날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내가 은밀히 경건의 시간을 가지곤 했던 그 숲 속으로 나아갔다. 그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깊은 의식으로 내 마음이 녹을 정도의 체험을 했다. 나는 이전에도, 그 후에도 그러한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마치 내 눈이 눈물의 샘 같았다. 그처럼 울어 보기는 정말 힘든 것이다. 내가 앉아 있는 곳이 내 눈물로 흥건하게 젖을 정도였다. 실로 내 마음 자체가 용해된 것 같았다. 마치 얼음조각이 태양의 열기로 녹는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마음이 녹을 정도의 감격적인 상태를 겪었던 기간 동안 내가 행했던 마음의 행사들에 대한 뚜렷한 회상을 지금은 해낼 수 없다.

 

몇 개월 동안 종교적인 의무들을 열심히 수행해 나갔다. 물론 느낌은 상황에 따라서 많이 차이를 나타냈다. 때로 나는 내가 진실로 그리스도인이요 새로워진 사람이라는 기쁨에 찬 소망을 가지기도 했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의심으로 침체될 뿐만 아니라, 아직도 내 죄 가운데 있다는 결론에 이르기도 했다. 이 기간 동안에 있었던 일 가운데 꼭 언급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내 자신의 마음이 악하다는 걸 갈수록 깊이 발견했다는 것이다. 깊이 뿌리 박힌 본성적인 부패에 대한 이러한 깨달음은 나를 크게 침체시켰다.

 

그러나 <안에 거하는 죄>(Indwelling Sin)에 대한 존 오웬(John Owen)의 글을 읽고 상당한 힘을 얻었다. 이 책은 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내 마음의 상태를 더 잘 알아맞혔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내 자신에 대하여 불만스러웠다. 왜냐하면 그러한 오랜 기간이 지난 후에도 나는 조금밖에 진보하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한번은 주일을 지내고 나서, 내 영혼이 멸망 받을 긴박한 위험 속에 처해 있다는 생각으로 너무 깊이 잦아들었다. 그래서 나는 엄숙하게 다시 내 구원을 안전케 하기 위한 새롭고 더 열심 있는 노력을 기울여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자기 노력 헛됨 깨닫자, 물 붓듯 은혜 쏟아져

나는 장시간에 걸쳐서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보고하는 책들을 읽었다. 그 책들은 오웬의 <영의 생각>, 에드워드의 <종교적 정서>,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으려는 자의 시련>, 존 뉴턴의 <서신들>, 파이크와 헤이워드(Pike, Hayward)의 <양심의 경우들> 등과 같은 책이었다. 그리고 나이가 많고 체험적인 그리스도인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고, 내 나이 또래의 사람들과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일을 해보았을지라도 그것이 내 진보에 그렇게 큰 유익을 끼친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 마음의 악은 오히려 더 증가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성경 이외의 다른 모든 책들은 옆으로 제쳐놓고, 내 모든 시간을 들여 성경을 읽으며 기도하되, 웬만큼 상당한 변화를 체험하기까지 그렇게 하겠다고 결심했다.

 

나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의 방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은밀한 은둔처로 들어갔다. 그리고 금식을 하면서, 강한 결심으로 내가 새로워졌다는 걸 발견하기까지는 내 노력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면서 그 일을 진행해왔다. 대여섯 시간 동안 성경을 읽으면서 기도하는 일을 계속했다. 그러나 내가 이러한 일을 계속하면 할수록 내 마음은 더욱 굳어져 갔고, 내 느낌은 더 곤고해졌다. 결국 나는 기진하였고 절망하였으며 도움을 받지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낙담하기 시작했고, 음울하고 낙담한 채 내가 갔던 그 은둔처에서 돌아왔다.

 

그때 나는 이러한 생각을 강하게 품게 되었다. 만일 내 스스로를 돕기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걸 발견했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향하여 긍휼을 요청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앞에 엎드려 세리가 했던 기도보다 ‘죄인인 나에게 하나님이여 긍휼을 베푸소서’라고 기도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내 자신에게 아무것도 도울 수 없다는 깊은 깨달음을 가지고 이 말을 했다. 이 말이 내 입 밖에서 나아가기도 무섭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속의 계획을 통해서 당신의 사랑을 나타내신 것을 내게 알게 하셨다. 그리고 경이로움과 사랑과 기쁨으로 나를 가득 채우셨다.

 

그리스도는 정말 내게 사랑스러우신 분으로 느껴졌고, 나는 그분을 ‘내 구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고난이 ‘나를’ 위하여 당한 것임을 알게 되었다. 내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있다는 이러한 충만한 확신을 누린 적이 그전에는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 하나님의 은총을 입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모든 의심이 사라졌다. 나는 처음엔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확신을 가지고 ‘내가 사랑하는 그분은 나의 것이요, 나는 그의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이러한 확신은 내 생각 속에 떠오른 어떤 암시나 어떤 자극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구세주인 그리스도를 값없이 나의 구주로 모실 수 있다는 분명한 관점과, 그러한 은혜를 진실로 받았다는 뚜렷한 확신에서 나온 것이다.

 

     '옛 사람'도 생각처럼 그렇게 쉽게 죽지는 않아

나는 성경을 펴들고 요한복음 18장 이후를 읽기 시작했다. 그 모든 말씀의 한마디 한마디와 나타나는 그 모든 감상이 영광스러워 보였다. 나는 전혀 새로운 각도에서, 진실로 그 책을 읽는 것 같았다. 성경의 각 지면마다 하늘의 빛으로 환하게 밝혀져 있는 것처럼 보였다. 성경을 언제나 이와 똑같은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니 기쁨이 넘쳤다. 나는 정말 영적 투쟁에 대해서 얼마나 조금밖에 알지 못했는지, 내 느낌이 조금 가라앉고, 그러면서도 복음의 영광스러운 진리는 아직도 뚜렷이 인식되고 있었다. 그때 나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내 자신을 공식적이고도 엄숙하게 드렸다. 내가 이러한 서약의 내용들을 쓴 다음에 이 약속을 인(印)치는 서명을 내 손으로 했다.

 

나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대하여 화해하였음을 확실히 믿게 되었다. 그러나 내 자신에 대해서는 자연히 의심스러운 생각이 나서, 성경을 내 행사의 순전성을 가늠하는 척도로 삼기로 결심했다. 우리 주님께서 ‘그 열매로 그들을 알라’고 말씀하셨듯이 산출된 열매로 최종적인 판단을 내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내 기억으로는 믿음이 사랑으로 역사하고 마음을 깨끗게 한다고 성경에 써 있는 것으로 알았다. 그래서 내가 최근에 너무나도 충격을 받았던 그 마음의 악들로부터 구원받을 것임에 틀림 없다는 소망을 가졌다. 그러나 안타까운 일이다! 며칠이 못되어, 그 ‘옛 사람’은 아직도 죽어 있지 않았고, 무서운 방식으로 투쟁할 힘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래서 몇 주간 후에 이 주목할 만한 확신을 가지기 전과 똑같은 영적인 상태에 떨어져 있었음을 나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이 사람의 진술은 갑자기 중단된다. 이 사람의 진술에 대하여 가장 먼저, 어떤 사람들은 진리를 아는 지식을 얻는 데 매우 느린 속도를 나타낸다고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한번은 이 진리를 발견하고 또 다른 진리는 다음 번에 인식하게 된다. 이러한 단계를 거치는 기간이 오래일 수 있다. 또 어떤 사람이 진리를 아는 지식에 이르기 전에 보통 그 진리를 알고자 하는 욕구를 예민하게 가질 수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그리고 진리를 아는 지식에 이르기 전에 그 진리를 전달해 주는 합당한 방편이 먼저 제공된다 할 수 있다. 책이나, 설교나 우연한 대화가 그 사람의 구원에 긴밀한 연관을 줄 수도 있다. 종교적인 삶을 시작한 사람들이 매우 진지하게 보일 수 있지만, 그 사람들더러 앞으로 언제나 전진해 나가라고 권면할 필요가 있다. 그들 앞에는 아직도 체험하지 못한 것들이 많다. 만일 그들이 아직 바른 길에 서 있지 못하다면, 언젠가는 그 바른 길에 도달할 수도 있다.

 

여기서 구체적으로 언급한 여러 다양한 모습들을 대충 훑어볼 때 은혜의 역사가 언제 시작되는지 말하기는 참으로 곤란하다. 어떠한 기준에서든지 두 사람을 뽑아놓고 물어보면 이 점에서 서로 의견을 같이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은 앞에서 묘사한 최종적인 단계에 이르기까지는 구원받는 믿음을 가졌다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고, 어떤 사람들은 영혼이 진지하게 종교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이 은혜의 역사라고 주장할 것이기 때문이다.

 

     길을 찾기 어려울 때는 성경에게 물어라

이러한 문제를 어떻게 결정짓든지간에, 내가 생각하기로는 한가지 증거는 분명하다. 어떤 사람이 회심하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그 사람의 회심과 본질적으로 연관을 맺은 어떤 것도 체험하거나 이루어지는 일이 없다고 상상하는 것은 정말 큰 실수라는 점이다. 그 사람이 선입견이나 어떤 성향으로 말미암아 취한 잘못된 많은 관점들을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다. 불행히도 회의적인 관념을 받아들인다면 그런 사람은 기독교의 진리를 배워야 한다. 성경이 사람의 의무와 구원의 참된 방식에 대해서 무엇을 가르치는지 배우고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자기의 선택한 백성들을 진리와 거룩의 길로 인도하시는 방식들은 때로 놀랍다. 하나님의 선택 받은 백성들은 매 단계마다 자기들이 알지 못하는 길로 인도받는다. 죄의 깨달음과 관련시켜 볼 때 이것은 얼마나 주목할 만한 일인가?

 

죄인이 가장 깊은 깨달음에 이르게 되었을 때 자기는 전혀 죄의 깨달음을 갖지 못했었다고 생각한다. 회심에 대해서도, 그 전에 생각하였던 것과 직접 그것을 체험하는 것과는 얼마나 다른가! 자기 구원을 걱정하는 영혼은 무언가 이적적인 것을 기대하거나, 아니면 전적으로 이치에 어긋난 어떤 것을 기대하면서도 새로운 생각의 노선을 체험하고, 진리에 대한 새롭고 즐거운 관점을 가진다. 그리고 그에 부합한 정서를 갖기도 한다. 그 정서로 말미암아 생각이 너무 사로잡힌 나머지 이러한 기쁜 체험의 본질과 원인을 면밀히 검토할 시간이나 추세를 얻지 못한다. 이것들이 새로워진 영혼의 관점과 느낌들인지 자문해 보지도 않고 믿고 소망한다. 그 후에도 그는 뒤를 돌아다보면서 바로 이러한 행동들 속에서 믿음이 행사되었고, 그때 그가 누린 평화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화해의 평안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사람의 진술의 마지막 부분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은바 될 때, 비통에 빠진 영혼은 대번에 행복한 상태로 소생함을 얻고, 하나님의 은총의 미소를 즐거워하게 된다. 그때는 하나님께서 화해하시며 자신에게 그 얼굴의 빛을 들어 보이신다는 점에 대해서 하등의 더 이상의 의문을 가지지 않는다. 마치 대낮에 태양빛을 의심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기쁨에 찬 발견을 하는 은총을 입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어느 정도의 어슴프레한 길을 걷기도 하고, 잘해야 새벽녘과 같은 희미한 빛 속에서 걸어가기도 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주님을 두려워하고 그의 종들의 목소리에 순종한다.


아키발드 알렉산더, <영적 체험, 회심에서 임종까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