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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ity

은혜 안에서의 성장

자라는 것이 없다면 생명도 없는 것이다. 중생한 사람들이 회심하는 순간, 그 영적 생명의 씨앗은 활력에 있어서 차이가 있음을 전제한 바 있다. 그것은 자연계에서 관찰하는 바와 유사하다. 또 의심할 여지 없이 그러한 양상은 성장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태어날 때 며칠 동안 약하거나 병들었던 어린 아이들이 건강해지고 강해져서, 처음에 더 큰 유리한 조건으로 삶을 시작했던 다른 사람들보다 크게 웃자라는 경우도 있다. 그렇듯이 ‘새 사람’의 영적 성장도 그러할 수 있다. 영적 생명을 가지기 시작했을 때 약하고 흔들리는 믿음을 가졌던 사람들이, 부지런히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방편들을 사용함으로써 하나님의 복을 받아, 시작할 때는 자기들을 크게 앞질렀던 사람들을 훨씬 능가하기도 한다.

 

흔하게 관찰되는 바이지만, 전혀 성장하는 것 같지 않고 오히려 계속 하향세를 나타내다가, 결국은 심령과 행실에서 자기들이 벗어났다고 자랑하던 바로 그 세상을 따라가게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런 경우에 결과는 두 가지 중 한 가지로 나타난다. 교회 안에 남아 있으면서 실상은 죽은 형식주의자가 되거나(살았다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계 3:1,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딤후 3:5), 아니면 신앙고백을 포기하고 교회와의 관계를 끊어버리는 쪽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원수들 편에 뻔뻔스럽게 선다. 불신앙의 모습을 보이는 데 있어서 다른 모든 사람들보다 훨씬 더 악독한 모습을 보이는 일도 드물지 않다.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우리는 확신 있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속하지 않은 자들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그들은 우리와 함께 있었을 것이다(요일 2:9 참조).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사람들에 대해서 더 말하지는 않겠다. 나중에 낙심자들의 경우를 상고해볼 것이다.

 

 

성경에서 명백하게 발견되는 것은, 은혜 안에서 자라는 일은 점진적이라는 점이다. 죄를 죽이고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으며, 모든 경건과 선한 행위에 있어서 넘치도록 더해가라고 신자들을 권면하는 대목들에서 그 점은 명백하다. 이 문제에 대하여 본문 말씀을 하나만 인용해도 충분할 것이다.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 3:18). 이 대목은 은혜 안에서 자라는 것의 기원과 본질에 대하여 정보를 제공한다. 그것은 ‘지식’(知識)이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다.

 

어느 영혼이든지 영적인 지식을 더 알아가는 만큼만 은혜 안에서 자라난다. 사람들은 다른 류의 지식에 있어서는 급속한 진전을 보일 수 있으면서도 경건에 있어서는 전혀 진전을 나타내지 못할 수도 있다. 오히려 그 정반대일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에 대한 이론적인 바른 지식으로 그 지성을 채울 수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이론적 지식이 사람을 겸손케 하기는커녕 ‘거만하게’ 할 수 있다. 정확하고 심오한 신학자들 중에는 구원의 광선을 전혀 쓰임받지 못하고 살다 죽은 사람들도 많다. 자연인은 아무리 많은 재능으로 은사를 받고 사변적 지식이 아무리 풍부하다 할지라도 영적인 분별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러한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없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하는 요점은 신적 조명은 말씀을 떠나서는 있을 수 없으며 말씀과 함께 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공적이든 사적이든 말씀을 부지런히 주목하는 그리스도인들은 경건에 있어서 자라기가 아주 좋은 위치에 있는 것이다.

 

아키발드 알렉산더, <영적 체험, 회심에서 임종까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