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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ity

'죄의 자각'의 필요성과 한계

죄인의 영혼을 영원한 구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성령께서 하시는 일들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죄를 깨닫게 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거듭나지 않은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런데 간혹 성경에서 제시하는 율법들에 비추어 보았을 때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도 성령의 역사로 죄를 깨닫게 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아래의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알렉산더 목사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그러한 인식은 인간 이성과 양심의 작용으로 인한 것이지 성령의 조명으로 인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죄를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전혀 없습니다.

 

죄에 대한 깨달음을 체험할 때 받는 위안

 

외면적 방편이나 환경에 대하여는, 어떠한 방편을 통해서 정신을 차리고 양심에 각성을 받았든지, 또한 그것이 점진적이었든 갑작스러운 일이었든지 문제될 게 없다. 이러한 것들은 나타난 효과의 성질을 결정하는 데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언제라도 경건하게 된 모든 사람들은, 어떤 방편을 통해서 그런 마음의 상태에 이르렀든지, 처음에는 진지한 생각부터 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얼마간 진지하게 되었다고 해서 그 사람들이 다 분명한 회심에 이르지는 않는다.

 

엄숙한 인생과 깊은 깨달음을 가지고도 구원받을 만큼 변화되는 열매를 거두지 못하고, 끝에 가서는 어떤 속임수에 빠지거나 다시 옛 상태로 돌아가 오히려 그 전보다 더 나빠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심지어 종교적인 인상들까지도 영혼을 막아 그 전보다 더 굳어져 버린 상태로 들어가게 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치 달구어진 쇠가 차가워지면 더 강해지는 것과 같다. 보편적으로 어떤 비상한 방편을 거치지 않고 점진적으로 다가왔던 인상들은 어떤 두드러지고 깜짝 놀랄 환경들 때문에 생성된 인상들보다 더 오래 간다. 그러나 여기에서마저 철칙은 없다. 영구한 효과들의 성질은 다만 확실한 표준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마 7:16).

 

죄를 혐오하는 것이 체험적 신앙의 필수적인 부분이라는 데 의심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하여 확실한 결론에 이르지 못하고 많은 의문을 불러일으킬 문제가 있다. 그것은 중생 전에 ‘율법작용’(Law-Work, 이 말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자신이 얼마나 죄인임을 깨닫게 하는 일 - 역자주)이 필요한가, 또한 모든 참되고 건전한 중생의 결과가 아닌지의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백년 전 바로 이 문제에 대해 논란하다 장로교회가 두 쪽으로, 곧 구파(舊派)와 신파(新派)라 불리우는 양편으로 갈라졌었다.

 

테넨트(Tennents)와 블레어즈(Blairs)는 중생 이전에 율법을 통해서 죄를 깨닫는 일이 필수적임을 크게 강조하였다. 반면에 톰프슨(Thompson)과 그의 협력자들은 그러한 율법작용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며, 또 그런 식으로 주장해서도 안 된다는 견해를 가졌었다. 내가 알기로는, 오늘날 부흥이 일어나는 곳에서는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견해가 주로 우세하다. 또 사람이 중생하기 전에 그러한 죄의식의 체험을 하는 건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성경이나, 또 그 경우의 본질상 그러한 예비적 작용의 필연성을 증거하기란 매우 어렵다.

 

어떤 사람이 어느 순간에 중생하였다고 생각해 보자. 그 영혼은 새로운 안목을 가지고 보기 시작할 것이고, 그 새로운 빛 가운데서 보이는 여러 것들 중 자기 죄를 제일 먼저 주목할 것이다. 그 사람은 자기가 행한 죄들이 율법을 범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을 뿐 아니라, 자기 죄악은 본래부터 존재하는 악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만 아니라 그러한 죄들 때문에 형벌 받아 마땅함을 알 것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직무들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리스도를 진노와 죄에서 구원하실 구주로 영접하도록 영혼을 참으로 준비시켜 주는 것은, 그와 같은 깨달음밖에 없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예민하게 체험하는 이른바 자기들을 정죄하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명백한 관점을, 중생치 못한 사람의 마음에 율법이 작용한 결과로 생긴 죄의식의 열매로 믿기는 어렵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그것이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사실뿐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들의 신적 탁월성을 아는 관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속성의 신적 탁월성을 아는 것은 숭앙심과 순종이나 복종의 감정을 일으킨다. 때로는 이 관점이 분명하고, 죄를 심판하는 것의 공평성과 정당성이 너무 뚜렷해 보이고, 순종의 감정이 너무나 강하여, 참된 회개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꺼이 저주받는 것이라는 매우 무모한 견해를 갖게 하는 기초를 형성한다. 그와 같은 죄에 대한 깨달음을 체험할 때, 그 순간 그 영혼은 자기를 위해서 구원은 없다는 견해를 취하는 게 보통이지만, 대부분 거의 곧 위안을 받는다. 언제나 방황하게 되리라 예기되던 그 영혼이 침착해 있는 모습을 보면 놀랍고, 정말 무어라 설명할 수 없다.

 

 

죄의 자각만으로는 변화를 기대할 수 없어

 

나에게 그리스도인의 체험을 설명한 최초의 사람은 침례교단의 어느 노부인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틀림없이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깊은 의식에 빠져서 지옥에 가면 어떻게 느껴질 것이고 어떤 일을 만날까를 생각하기 시작했노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가공할 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데 전력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질겁하여 그런 생각을 털어버렸다. 이제 자기는 지옥에 간다 할지라도 자기를 향하신 선하심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사랑할 것이라고 느꼈다. 왜냐하면 자기는 멸망 받아 마땅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성품을 초지일관 지키시다 이러한 형벌을 자기에게 부과했을 뿐이라는 걸 알게 됐기 때문이다.

 

자, 분명히 그녀의 마음은 변화되어 있었다. 물론 위로의 광선이 그녀 마음을 덮고 있는 어두움을 쫓아내지는 않은 상태였지만 말이다. 그러나 보통 패역한 자는 이러기보다 먼저 하나님을 거스르고 하나님의 처사에서 흠을 발견하려고 애쓰지 않는가? 많은 경우에서 그럴 수 있다. 그러나 누가 생각하듯이 그러한 느낌은 보편적인 것은 아니다. 경건한 사람들의 증거를 기초하면, 맨 처음 죄의 자각이 일어날 대에는 죄의 위험보다 죄의 악함을 깨닫는 자들이 많다. 그리고 죄 지은 것 때문에 양심의 참된 가책을 느끼고 아울러 하나님께 배은망덕했다는 생각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는 실제적으로 큰 중요성을 지닌 것은 아니다. 물론 참으로 경건한 사람들 중에는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류의 죄의 자각을 체험한 적이 없고 그 체험이 꼭 필요하다고 어떤 설교자가 고집스럽게 강조하니 침체에 빠지고 당황하기도 한다.

 

패역한 자들도 체험할 수 있는 것 - 심판 날에 죄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나 느끼게 될 것과 전혀 다름이 없는 것 - 이 참 종교의 필수적인 부분일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성받은 사람들은 대부분 첫 단계에서 단순한 율법적 정죄감을 느끼는 게 보통인 것 같다.

 

중생치 않은 상태에 있는 사람은 영적으로 죽어 있다. 곧 참된 거룩의 흔적을 조금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렇지만 여전히 이성적인 존재요, 선악을 분별할 수 있고 도덕적 당위성의 힘을 느낄 수 있는 양심을 가지고 있다. 그런 사람도 자기 죄를 분명히 생각해 내고 자기의 양심도 자극 받아 자기는 정말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을 범한 자라는 걸 느낄 수 있게 된다.

 

하나님 성령의 보통작용에 의해서 얻어지는 이러한 죄의식과 통찰력을 보통 ‘죄책감’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이러한 관점과 느낌들이 전혀 새롭게 되지 않은 자의 생각 속에서도 매우 분명하고 강할 수 있음을 전혀 의심할 수 없다. 실로 그것들은 어느 누구나 심판날, 양심의 정죄를 받고 그 심판장 앞에서 죄책어리게 서 있게 될 때에 체험할 것과 본질이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러한 류의 죄의 자각에는 마음을 변화시키거나 선하게 할 만한 성향이 전혀 없다.

 

아키발드 알렉산더, <영적 체험, 회심에서 임종까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