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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ity

불완전한 성화와 영적 투쟁

이 글은 성화에 대한 어려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기독교에 많은 교파가 생긴 것도 바로 이와 관련된 논쟁에서 비롯된 경우가 대부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거듭난 그리스도인이 죄로부터 완벽하게 구출되었는지, 아니면 계속해서 죄와 싸우며 점진적으로 발전해 나가는지 아직도 확실한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다. 이 글을 쓴 알렉산더 목사도 성화에 대한 교파간의 커다란 견해차에 대해 당혹스러워하며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으로 글을 끝맺고 있습니다. 성화에 대해서는 아직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가장 안전한 편에 서는 것이 현명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죄인을 온전케 하기 충분하여 새로운 피조물 속에 영적 생명의 씨앗을 심으시기까지 하시면서도 하나님께서 일을 불완전한 채로 놓아두신다는 사실을 설명한다는 것은 난해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의 성경관과, 체험으로 알려진 사실을 보는 우리의 관점에 따르면, 이러한 불완전은 인간 삶의 전 기간 동안 계속된다. 그 인간의 삶이 어느 정도까지 연장되든지 간에 그러한 불완전은 계속된다. 그 사실을 설명하기도 지난하다.

 

죄는 몸이 아닌 영혼 속에 자리잡는 것

 

사실 어떤 사람들은 신자들 속에 남아있는 죄는 몸 안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서 이 죄악적인 몸이 존재하는 한 이 속에서 자라나는 부패는 정도에 차이는 있지만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견해는 교회사의 맨 초기시대에서부터 주장되어 온 것 같은데 아마 플라톤 철학에서 연유된 것 같다. 플라톤 철학은 악의 기원 문제를 깊이 생각한다. 내주하는 죄가 어디에 자리잡고 있느냐는 문제를 그런 관점으로 보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은, 금식이나 몸의 다른 금욕생활에 상당한 강조점을 두게 되었다. 금식이나 몸의 다른 금욕생활은 몸으로 하여금 힘이 없게 만들고 쇠약하게 만든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원리는 거짓된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원리 위에 서 있는 모든 것들은 그와 똑같이 거짓됨에 틀림없다. 물론 몸이 영혼과 관련을 맺어 죄로 오염된 것만은 사실이지만, 몸이 불의의 원천은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 어떤 것을 아무리 호기심어리게 유기적으로 조직하고 거기에 생명을 불어넣는다 할지라도 영혼이 없으면 그것은 도덕적 책임자가 될 수 없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은 도덕적 성질에 속한 것을 감지할 수 없다.

 

죄는 자유롭게 이성적인 활동을 하는 영혼 속에 기원을 둔 것이며 그 영혼 속에 자리를 잡고 있다. 몸 속에 자리를 잡고 있는 욕구들과 정욕은 지나치고 무절제함을 통해서 죄의 성질에 참여한다. 그리고 흔히 그 소욕의 탐욕이 의지에 영향을 주어 선하지 못한 것, 또는 가장 선하지 못한 것을 선택하도록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은 여전히 큰 장애물이며, 몸 속에 자리잡고 있는 그 소욕과 정욕들은 만족감을 얻으려고 탐욕을 부리는데 매우 격렬하기 때문에 경건의 행사를 크게 어지럽히고, 때로는 은혜로 말미암아 심기워진 더 높은 원리들을 거스려 장악하기까지 한다. 몸은 역시 여러 질병에 걸린다. 몸과 영혼 사이에 긴밀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질병들이 마음에까지 강력한 영향을 행사할 수 있으며, 때로는 경건의 큰 장애물을 낳기도 하고 경건의 행사를 어렵게 만들기도 한다.

 

마귀의 기습 공략 막는 길은 깨어 있는 것

 

같은 영혼 속에 두 반대되는 원리들이 존재하기에, 그 둘 사이에 끊임 없는 투쟁이 전개될 것임에 틀림없다. 결국 ‘약한 자가 죽기까지’ 그러한 투쟁이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박혔지만 이 세상의 삶 속에서는 그 명맥을 반드시 이어가기 때문에, 육과 영 사이의 투쟁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는다. 이러한 정반대되는 도덕적 원리가 같은 본성적인 기능들과 정서들을 통해서 작용하기 때문에, 당연히 한 편이 힘을 얻으면 다른 편은 그에 따라서 약해질 것임에 틀림없다. 체험에 비추어보면 죄의 세력을 제어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식은 거룩의 원리를 장려하고 연습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사랑이 식어지거나 그 열기가 떨어지면, 죄의 활동은 더욱 활발해지고, 나면서 가지고 나온 그 부패의 소용돌이를 더 예민하게 느끼게 된다.

 

 

반면에 은혜의 원리가 힘을 얻으면 그에 정비례하여 악의 원리는 힘을 잃게 된다. 어떤 특별한 정욕을 매번 이기면 그 정욕의 힘은 약해진다. 그리고 끊임없이 은혜 안에서 성장하면 나면서부터 타고난 죄를 이길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여 성숙한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죄를 장악하는 데 익숙해진다. 그리고 이러한 투쟁이 시작될 때 겪어야 하는 그러한 격렬한 갈등에 넘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성숙하지 못한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죄가 죽은 것처럼 보이는 걸 보고 크게 기만을 당한다. 죄가 자신을 새롭게 드러낼 더 좋은 결정적 호기회를 노리면서 기만적으로 가만히 자신을 숨기고 있을 때 그러한 속임수에 넘어간다. 어떤 사람이 어떤 은혜로운 순간에 자기 마음 속에 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할 대, 죄는 죽은 것 같고,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정욕은 완전히 소탕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생생한 감정이 사라지고, 육신적인 것들이 다시 머리를 들기 시작할 때, 잠재적인 불의의 원리가 제 모습을 드러낸다. 흔히 원수가 죽었고 승리는 얻었으니, 그 결과 깨어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큰 희망에 찼던 그리스도인이 갑자기 죄의 기습으로 공략을 당하여 넘어지는 일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투쟁에서 더 큰 피해를 보는 것은, 원수들이 공개적이고 격렬한 공략을 할 때보다도, 원수들이 육신적인 안일의 잠을 자도록 그리스도인들을 달래는 은밀하고 음험한 감화를 통해서이다. 이러한 투쟁을 겪어 나가는 데 있어서 깨어 있는 것보다 더 필수적인 의무는 없다. 계속 졸지 않고 깨어 있는 것은 필수불가결한 일이다.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있어 기도하라”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첫사랑의 열정, 식지 않았는가 성찰해야

 

분명히 죄악적으로 보이는 것들보다 합법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것들이 함정이 되는 경우가 더 흔하다. 모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일을 정직하게 하는 건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이러한 목적만 가지고 부지런히 추구하여 일하다 보면 세상을 사랑하는 정신이 점차 마음을 장악해 들어온다. 부(富)를 소유하는 것이 중요하게 여겨진다. 영원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생각이 멀어진다. 또 영원한 문제들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고, 영원한 문제들에 대한 생각으로 받은 인상이 희미해진다. 세상적으로 마음이 혼미해지고 세상적인 관심에 마음이 얽혀들면 영적 생명은 약화된다. 처음에는 병든 상태로 출발하지만 나중에는 서글픈 침륜으로 빠진다. 안타까운 일이다! 바로 그리스도인이 그러한 경우에 처하는 일이 있다.

 

신앙의 길을 처음 시작할 때 가졌던 불타는 열심은 어디로 갔는가? 세상을 텅 빈 지푸라기로 보면서 그처럼 만족해하며 복음 종교의 위안을 즐거워하던 그 모습이 어디로 사라졌는가? 기도를 기쁘게 해나가게 했던 그 기도의 영이 지금은 어디 있는가? 세상의 일에서 마음을 돌려 성경의 거룩한 교훈을 정독하도록 이끌어 주었던 그 성경에 대한 사랑은 어디 있는가? 오! 그 얼마나 달라진 모습인가! 독자여 당신이 바로 그러한 경우가 아닌가, 그렇게 떨어져 처음 사랑을 버린 사람은 아닌가. “그러므로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무서운 심판이 그대에게 이르지 않도록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을 다스릴 매를 쥐고 계신다. 말씀의 경고와 권면과 성령의 은밀한 속삭임을 무시할 때에 어떤 고통스러운 섭리를 보내신다 - 그 죄와 너무나 자연스러운 연관을 가져 그 죄에 대한 징계로 주어진 것을 지시할 정도로 어떤 참화를 보내신다. 주님의 징계의 매는 매우 매섭고 따가울 경우가 흔하다. 그러나 주께서 그러한 매로 때리시는 것은 자기 자녀들로 하여금 열매를 맺도록 그렇게 하시는 것이다. “무릇 징계가 당시에는 즐거워 보이지 않고 슬퍼 보이나, 후에 그로 말미암아 연단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나니”.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괜스레 고통을 가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그의 거룩하심에 참여케 하시는 분이시다.”

 

영국의 로버트 호커(Robert hawker)의 추종자들은 극단적인 칼빈주의자들인데, 그들은 ‘우리 지체 속에 있는 법’은 우리의 중생이나 성화로 말미암아 조금도 영향을 받거나 약해지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 세상에 살아 있는 동안 그 ‘우리 지체 속에 있는 법’은 여전히 같은 상태로 남아 있으며, 그리스도인이 영위할 수 있는 어떠한 신앙상의 진정으로도 그 힘이 약화되지 않는다는 견해를 고집한다. 그러나 그러한 입장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위배된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일 죄에 대해서 죽는 것’에 관해 말하고 있다 - ‘몸의 행실을 죽이는 것’ -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는 것’ 등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체험의 상호교환과 비교는 유익한 일

 

더블린의 윌리암 워커(William Walker)도 그와 유사한 견해를 밝히고 있는데, 그 사람은 <웨슬레파 메도디스트(감리교회)교도들에게 행한 유능한 연설>에서 그 관점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할 때, 그 사람은 다음과 같은 견해를 취하고 있다. 점진적인 성화의 역사 같은 것은 없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드리는 것’(헌신)을 뜻하는 그러한 점진적인 역사가 없다는 주장이다.

 

바로 이 앞 장에서 나는 회심 때에 영혼이 나타내는 여러 가지 양상의 성질에 관해서 기독교단들마다 서로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음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영적인 투쟁과 성황에 이르러서는 훨씬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필자는 어느 교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공격을 가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또 논쟁을 불러 일으키고 싶은 심정은 더더구나 없다. 여기가 논쟁을 위한 마땅한 장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로 다투는 상황 속에서도 서로 화평한 터전이 있어서,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참된 제자들이 함께 앉아서 주님의 인애하심과 자기들을 향하신 신실한 주님의 역사에 대한 체험을 서로 비교해 볼만한 그런 화평한 자리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마다 체험적인 국면에 이어서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그리스도인들과 어느 정도의 차이가 나며, 어떠한 점에서 일치하고 있는지를 단순하게 진술한다는 것은 어느 그리스도인들에게도 불쾌감을 주지 않을 것임에 틀림없다. 어떤 편에서든지 실수나 잘못된 관점이 있다면, 그것을 숙고하고 고쳐야 할 것이다.

 

 

로마서 7장의 참된 해석문제로 서로 상당한 의견 차이가 있어왔다. 특히 바울이 말하는 영적 갈등에 대한 묘사를 두고서, 바울 자신의 인칭 대명사를 쓰면서 회심한 죄인의 상태를 묘사하는지, 아니면 자기가 자신의 마음의 느낌을 정직하게 피력하고 자기 가슴 속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죄의 세력과 거룩한 세력 사이의 고통스러운 갈등을 묘사하는지, 그 문제들로 상당한 논란을 벌여왔다. 의심할 여지 없이 후자의 경우가 분명하다. 왜냐하면 사도는 1인칭대명사를 써서 말하고 있으며, 다른 어떤 제 3자의 인칭대명사를 전혀 감안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에 나오는 표현들 중 어느 것들은 성경에 나오는 어떠한 표현만큼 중생한 마음을 강하게 묘사하고 있다. 중생한 마음이 아니면 어느 누가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라고 말할 수 있는가?

 

7장을 끝막음하는 말씀은 사도가 자기 자신의 영혼의 상태를 상세하게 묘사하고 있었음을 매우 분명히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러한 격렬한 갈등 속에서 자기에게 이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전히 사도는, 서로 상합할 수 없는 두 원리가 자기 나름의 본성을 따라서 끊임없이 자기에게 작용하고 있음을 진술하고 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의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성화와 죄’에 대한 교파간의 큰 견해차

 

아르미니우스(Arminius)는 로마서 7장을 강해하는 책을 씀으로써, 개혁파교회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견해를 거부하는 데서부터 자기의 일을 시작했다. 폴란드의 파우스투스 소시니우스(Faustus Socinius)가 같은 시기에 똑같은 주제로 책을 써서 그와 유사한 관점들을 지지한 것은 주목할만하게 서로 짝을 이루는 일이다. 이 주제는 디킨슨(Dickinson)학장의 여러 편지를 묶어 출간한 <서신집>에 나오는 한 편지에서 매우 훌륭하게 다루어진다. 후레이저(Frazer)가 ‘성화’에 관하여 쓴 책 속에서는 그 문제가 더욱더 광범하게 다루어진다. 그리고 챨스 핫지는 그의 로마서 주석에서 그 주제를 예리하고 공평하게 다루고 있다.

 

존 웨슬레를 추종하는 사람들은 웨슬레가 기록한 견해에 찬동을 나타내면서, ‘성화’는 점진적인 역사가 아니라는 견해를 취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만일 성화가 점진적인 작용이라면 이 세상에서 아무리 선하게 산다 할지라도 그 성화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만 중생처럼 성화도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며, 그 결과는 내재하는 죄에서 완전히 구출받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신자가 완전히 거룩하게 되는 순간부터 더 이상 죄를 짓지 않고 - 이 높은 은혜의 상태에서 떨어지지 않는 한 - 생각과 말과 행동에서 의로운 행실을 행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성화에 도달하는 것을 주장하는 아르미니안의 종교적 체험과, 은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안에서 자라나기를 추구하는 칼빈주의자 사이의 유사성이 전혀 있을 수 없다. 전자는 성화의 문제에 있어서 생각하기를, 내적이든 외적이든, 본성에든 아니면 행동에든 죄는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영구한 기쁨을 누린다는 것이다 - 지상에서도 하늘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빈주의자는 자기의 뜻을 거스려 강력하게 역사하는, 이른바 본원적인 부패에 대한 깊은 의식으로 신음한다. 그 부패가 끊임없이 자기의 진로를 방해하고 진척시킨다고 신음한다. 칼빈주의가 흔하게 쓰는 언어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는 사람들이 종교적인 체험에 대해서 대단한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발견한다. 만일 아르미니안의 체험이 하나님의 말씀과 부합한 것이라면 그 사람은 죄를 회개하며 마음이 상해 있는 사람, 너무 탄식한 나머지 눈물로 자기 요를 띄운다고 말하는 사람에 대해 대단히 큰 이점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거룩함을 입은 죄인들로서의 우리의 조건에 대해서 이처럼 광범한 견해차이를 좁히는 방법을 우리는 알고 있지 못하다. 어디엔가 큰 잘못이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나는 진지하게 하나님께 기도한다. 만일 이 주제에 대해서 내 관점이 그릇되다면 그것을 고치게 하옵소서!

 

아키발드 알렉산더, <영적 체험, 회심에서 임종까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