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hristianity

대단히 중요한 거듭남의 사건

현대사회의 가장 큰 불행 중 하나는 교회가 그들의 본분을 망각한 듯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한때는 교회 구성원들에게서 보이는 거룩함 때문에 외부인들이 외경심을 가지고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교회를 바라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이 대체 무엇이길래 세상이 주는 모든 즐거움을 마다하면서도 쫓아가는지, 그것이 궁금해서 기독교에 관심을 품게 만들 수 있을 정도로 교회의 영광이 살아있던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겉으로 봐서는 교회인지 문화센터인지 구별하기 힘든 교회들까지도 생겼습니다. 세상이 따라가는 길의 정반대 방향을 가리키던 교회가 이제는 세상적인 사람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각종 서비스로 무장한 채 덩치만 커지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의 가장 핵심적인 원인은 바로 교회가 거듭남의 교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아래의 글은 작금의 신앙서적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거듭남의 중요성에 대한 알렉산더 목사의 글입니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사건 중에서 불멸의 영혼이 새로 태어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사건은 없다. 명성을 얻는 영웅들, 나라와 제국을 손에 쥘 영웅들도 자주 태어난다. 그러한 사건들도 휘황찬란함으로 장식되고, 시인들과 웅변가들은 그렇나 사건을 기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모든 자녀로 태어나는 사람마다 물려받을 기업과 영광에 비하면 그러한 세상의 모든 영예와 기업들은 어린 아이들의 노리개감에 지나지 않는다.

 

 

중생은 그 무엇과 바꿀 수도 비길 데도 없는 대사건

 

그러나 이러한 위로부터 태어나는 일,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본성을 가진 모든 복락들과 특권들을 누릴 어린 상속자가 태어나는 일에 대하여 세상이 큰 관심을 나타내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하나님께로 온 구세주에게나 하나님 자녀들에게나 세상은 똑같은 자세를 나타낸다. “세상이 저를 알지 못함같이 저희를 알지 못하니라.” 그가 태어나셨던 밤에 거룩한 나라의 각처에 흩어졌다가 모인 다윗의 후손들이 그곳에 큰 떼를 이루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 밤에 구주가 탄생하신 것을 아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천사들이 하늘의 찬송으로 그 사건을 기렸고, 들에서 양떼들을 지키는 단순한 목자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였다. 그러므로 떠들썩하고 경건치 않은 세상이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사건들에 대하여 이들 하늘에 사는 하나님의 사자들은 여전히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왜냐하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한 영혼이 하나님을 위해서 태어날 때 그들이 얼마나 확실히 알 것인가를 물어볼 필요는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에게는 알려지지 않는 지식의 기능들과 자원들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든 천사들이 부리는 영으로서 구원 얻을 후사들을 위하여 섬기라고 보내심을 받은’ 자들임을 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떻게 그 사역을 감당하는지는 말할 수 없다.

 

만일 악한 영(靈)이 우리 마음 속에 악한 생각을 주입할 수 있다면, 어째서 선한 영들은 경건한 생각들을 주입할 수 없는가? 또는 우리가 각성받도록 문득문득 기회를 따라 인상을 심어주거나 어떤 방식으로든지 우리의 생각의 노선을 달리할 수 없을까? 의심할 여지없이 마귀도 죄인이 하나님께 회개하면 금방 알아차린다. 왜냐하면 죄인이 회개할 때 자기 부하 하나를 잃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아마 회심이 일어나는 경우에 마귀가 그 회심을 막으려고 온갖 수단을 강구해 보지 않는 경우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다루는 주제로 돌아와 보자. 죄로 죽은 영혼에 영적 생명이 심기워지는 일은 끝없는 귀추들을 가져올 사건이다. 상수리를 심으면 그것이 싹이 나고 자라나지만, 그 나무가 얼른 성숙된 모습을 보이길 기대하지는 않는다. 금방 가지가 뻗어나가고 그 뿌리가 땅에 깊이 박힌 굉장한 참나무가 되기를 바리기란 더욱더 곤란한 일이다. 여러 해 겨울의 맹렬한 돌풍을 맞기도 하지만 그 모든 바람을 견뎌낸다. 그러나 결국 이 거대한 참나무와 공중에 놀랍게 뻗어 있는 가지들도 다 넘어질 때가 온다. 나무도 사람들처럼 나이가 많으면 죽는다. 그러나 은혜로 영혼 속에 심어놓은 것은 언제나 살아 있다. 그것들은 언제나 푸른 신록으로 번성해갈 것이다. 그것들은 다른 영역, 다른 세계에 이식될 것이다. 하나님의 낙원에서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때는 하나님의 시온에서 그 사람이 태어나는 때다. 그것을 아는 자들이 별로 없다. 그 사건에 관심을 가지고 그 사건의 중요성을 생각하는 자들도 얼마 되지 않는다. 그러나 독자들이여, 이 가녀린 움, 처음 발아된 싹은 바닷가에 있는 모래보다 더 많은 무궁 세월 동안 자라고 번성해 나갈 것이다.

 

상징의 옷을 벗겨버리고 솔직히 말한다면, 이 새롭게 된 영혼은 하늘에 있는 성도들 가운데 알려질 것이고, 하나님과 어린 양 보좌 주위에서 항상 끊이지 않고 노래를 부르는, 내세의 수천 수백 만의 찬양대에 함께 참여하게 될 것이다. 그 영혼은 순전하고 거룩하게 되어 - ‘티나 흠이나 주름잡힌 것이나 그러한 것들이 없이’ 될 것이다. 물론 복된 천사들의 존재와 여전히 구별되기는 하지만, 그 영혼은 천사처럼 밝고 도덕적 오염에서 벗어난다. 다만 천사들이 함께 부를 수 없는 노래를 부르고, 어린 양의 피로 희게 빤 의복을 입고, 하나님의 아들에 대해 가브리엘보다 더 가까운 친속의 권리를 가짐으로써 그 복된 천사들과 동등하다. 그처럼 불멸의 복락의 기초를 놓는 사건인데 어찌 작다 하겠는가? 다시 말하면 ‘영생’의 기초를 놓는 사건이 아닌가?

 

영적 생명의 움직임과 활동모습은 차이가 다양해

 

우리는 인내와 공평의 정신으로 ‘거듭난 자’가 처한 환경들과 거듭난 증거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여기서는 유치한 새 신학이 오늘 우리 시대에 쏟아 놓은 얼토당토 않는 모든 개념들 중에서 죽은 죄인이 스스로 살 수 있다는 개념만큼 무모한 것이 없음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람이 제 힘으로 자신의 영적 생명을 낳는다는 개념은 육신적으로 혼자 자기 생명을 출생시킨다는 상상만큼이나 이치에 맞지 않는다. 영혼을 파쇄시키고 하나님을 모독하는 모든 감상들이여 물러갈지어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성령으로 난 자들이니라)”(요 1:13). “죄와 허물로 죽은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

 

 

그러나 이렇게 새롭게 하시는 성령의 놀라운 사역을 추적할 수 있는 이가 누구인가? 뼈와 근육이 모태에서 어떻게 조성되는지 말할 수 있겠는가? 거듭나는 일에도 비밀이 있음에 틀림없다! 우리 주님이 니고데모와 이 주제를 중심으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서 니고데모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땅의 일을 말하여도 너희가 믿지 아니하거든 하물며 하늘 일을 말하면 어떻게 믿겠느냐?”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거듭난 영혼이 초기단계에는 여러 가지 다양한 영적 생명의 움직임과 활동 모습을 드러낸다. 영적 생명을 갖도록 역사하시는 분도 같고, 그 영적 생명을 받는 자의 죽음의 상태도 같다. 거기에 쓰여지는 방편도 같고, 그 효과의 본질도 어느 경우에나 다 동일하다. 그러나 환경들은 크게 다양하여 그 나타남과 표현 양식에 있어서 대단히 다양한 모습을 드러낸다. 그 차이는 생명의 씨앗 속에 어느 정도의 활력이 부어지는가에 따른다. ‘새로운 피조물’은 하나님의 손에서 왔으니 - 그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지만 - 모든 방면에서 동일하고 그 가치에 있어서도 동등하다는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육신적인 생명이 그 원초적인 활력에 있어서 많은 차이가 나듯이, 영적인 생명이 처음에 가지는 활력도 다양한 차이를 드러낸다. 그러니 그것이 영적 생명의 모든 작용과 외적인 양식을 뚜렷하게 차이 나게 함을 누가 알지 못하겠는가? 육신적으로 말하여 어떤 어린이들은 낳자마자 힘이 있고 건강하고 활동적이다. 그러므로 그런 갓난 아이를 옆에서 바라보는 사람마다 그 아이가 살았고 강한 감각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차린다. 반면에 어떤 아이들은 세상에 나올 때 그 생명의 기운이 너무 약하여 숨을 쉬고 있는지, 심장과 동맥이 뛰고 있는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다. 살았다는 것이 확인되지만 생명의 힘이 너무 약하고 좋지 아니한 징후들과 환경들로 감싸여 있어 그 어린 아기가 성숙하게 자라나리라는 기대가 적어진다. 거듭나는 경우에도 역시 그러하다.

 

영적 교만과 무분별이 상황 급전케 해

 

어떤 사람은 대번에 낮의 총명한 빛 속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그들은 ‘흑암에서 복음의 기이한 빛 가운데로’ 들어간다. 그에 따라 ‘옛 것은 지나가고 모든 것이 새롭게 된다.’ 그 변화는 너무나 분명하고 두드러진다. 마치 새 세계로 옮겨진 듯한 느낌을 준다. 의(義)의 태양이 작은 구름에 가리는 일도 없이 그들을 밝게 비추어준다. 하나님께 속한 일들을 깨닫는 것이 어찌나 새롭고 분명한지, 그들은 자기들이 다른 사람들을 확신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진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들과 똑같이 알게 하고 느끼게 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다. 실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어째서 이러한 빛 가운데서 사물들을 항상 보지 못했는가를 의아하게 생각한다. 어째서 다른 사람들은 자기들처럼 보지 못하는가 이해할 수 없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존재만큼이나 자기들의 회심을 확신할 수 있다. 다소 사람 사울이 그러한 경우였다. 제임스 가디너(James Gardiner) 제독의 경우도 그러하였다.

 

이러한 밝은 날도 구름이 낄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위에서 언급된 두 사람의 경우에는 정말 그들이 하늘의 날빛을 누렸었던가 의심하게 할 만한 구름조차 지나간 적이 없는 것 같다. 그러나 아침에는 구름 한 점 없어 태양 빛이 밝게 비치다가도 시간이 가면서 낮고 어두운 구름으로 음울해지고, 하루가 다 가기 전에 엄청난 태풍이 불어 흉흉하게 되는 날도 많다. 영적인 생활에 있어서도 그럴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가장 상서로운 분위기 속에서 순례길을 출발하여, 산 위에 어찌나 든든히 서 있는지 “나는 결코 요동치 않으리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주께서 얼굴을 가리우실 때 그들은 금방 고통을 당하며, 오랜 기간 동안 어둠 속을 지나야 하며, 한 점 빛도, 한 마디의 위로의 말도 없이 순례길을 가데 된다. 보통 이러한 급변하는 상황은 대개 우리 자신의 영적 교만과 무분별이 초래한 결과이기 쉽다.

 

사람들이 보통 가지고 있는 견해가 있는데, 가장 악한 죄를 지은 자들이 죄에 대해 가장 강력한 자각을 하며, 지옥을 가장 무섭게 생각한다는 견해이다. 그러나 그 견해도 바른 것이 아니다. 그러한 일반적인 견해에 대하여 할 수 있는 말이 있다. 은혜의 역사가 처음에는 매우 느리게 진행되기도 하며, 끼치는 인상들이 너무 미약해서 낙관적인 결과를 기대하기 곤란할 적도 있다. 반면에 흠잡을 데 없이 고상한 도덕적 성품을 가졌고, 종교 교육의 영향을 받아 언제나 종교를 존중하며 그 규례를 높이는 어떤 사람들이 죄의 자각을 할 때면, 큰 범죄로 얼룩진 삶을 살았던 자들보다 더 무서운 죄책감을 가지고 더 큰 비통감에 사로잡혔다.

 

아키발드 알렉산더, <영적 체험, 회심에서 임종까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