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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ity

거듭남 체험이 다양한 이유와 주의점

어떤 사람이 거듭났는지 아닌지를 생각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거듭남은 그 사람의 구원과 직결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다른 사람이 구원받았는가에 대해서는 잘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경우에 따라 그 사람에게 불쾌감을 줄 수도 있고, 또 대화를 해보아도 그 사람이 진실로 구원받았는지를 확실히 알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신이 구원받았는지 스스로 검증해 보라’는 식의 이야기를 교회에서 들어보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영혼의 영원한 안녕이 달려있는 문제인 만큼 지속적으로 제기되어야 할 질문입니다(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 고후 13:5).

 

우리는 앞에서 영적 생명의 원리가 두 조건 - 그 원리에 처음 주어진 활력의 정도와, 지식이나 판단의 성숙도의 차이 - 에 따라 어떤 양상을 나타내는지 알아보았다. 이제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행사와 느끼는 위안에서 나타나는 큰 다양성의 또 다른 풍성한 이유를 생각해 보자.

 

같은 충격이라도 기질에 따라서 다른 반응 나타내

 

그것은 ‘기질’의 차이인데, 누구나 잘 아는 국면이며 성격을 형성하는 데 매우 큰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다른 문제들에 있어서는 사람들의 느낌을 조정하는 역할도 한다. 같은 환경을 만나더라도 사람들마다 지극히 다른 감정의 반응을 나타낸다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강한 정서와 열정적인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자기가 사랑하는 아내나 자녀가 갑작스럽게 타계하면 좀체로 가라앉지 않는 고뇌 어린 슬픔 속에 빠져버린다. 반면에 차갑고 냉정한 기질을 가진 사람들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격렬한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참을성이나 인종(忍從)의 힘이 더 많은 것은 아니다. 사실은 정반대일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의 감수성이 덜 예민한 편이다.

 

이러한 기질상의 차이는, 유사한 조건에서 소망과 두려움을 느끼는 정도가 달리 나타나는 성향에서 그 모습을 가장 강하게 드러낸다. 어떤 사람은 기대할 만한 결과를 위해서 조그마한 근거라도 있으면 언제나 소망을 가질 것이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악한 경우를 상정하여 크게 두려워한다. 그들의 염려는 거기에 걸린 이해 관계의 광대성에 비례한다.

 

사람들의 종교적인 느낌이 동일한 원인들의 영향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놀라운 일인가? 어떤 두 사람이 죄를 깨닫고 미워하게 된 사실과, 그들의 슬픔과 소망을 말할 때, 같은 진리를 가지고도 다혈질의 사람이 그 정반대의 성향을 가진 사람보다 더 예민한 정서를 나타낼 것이다. 또 동일한 증거를 보면서도 다른 기질 속한 사람들보다 더 큰 확신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야겠는가? 틀림없이 어떤 사람의 기쁨이 다른 사람의 기쁨보다 훨씬 더 뚜렷한 모습을 보일 것이다. 그래서 죄의 깨달음과 믿음의 행사와 회개에 있어서 매우 유사한 체험을 한 두 사람을 예로 들어 생각할 때, 한 사람은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는 강한 확신을 나타내는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두렵고 떨리는 소망을 표현하기가 무섭다. 물론 이 두 부류의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전자가 더 많은 위안을 받고, 후자가 전자에 비해서 더 안전하다. 왜냐하면 가장 강한 증거가 아니면 그 어떠한 증거로도 쉽게 만족하려 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기쁨과 슬픔, 소망의 생기발랄한 정서를 일으키는 이 천성적이니 원인과 크기가 다를 뿐 아니라, 표현양식에 있어서도 보통 매우 다르다. 다혈질의 사람은 매우 강렬한 느낌의 충동 때문에 사물들을 강하게 표현한 나머지 거의 과장하는 지점에까지 나아간다. 그들은 자기들의 느낌을 온전히 부각시키고 싶어 최상급과 강한 강조의 어법을 사용하게 될 것이다. 반면에 보다 냉정한 기질과 소심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은 실상에 미치지 못하게 자기들의 기쁨을 묘사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자기들이 체험한 것을 다른 사람들이 너무 높게 생각하지 않게 하려고 조심한다.

 

 

같은 말로 표현해도, 느낌은 근본적으로 달라

 

이러한 차이는 그 원인의 영구성 때문에 이러한 부류의 그리스도인들의 종교 체험을 특징짓되, 그들의 전체 삶의 노정을 통해 나타나는 체험을 특징짓는다. 그러한 차이는 운명(殞命)하는 시점에서도 동등한 모습을 나타낼 수 있다. 그러니 진지한 사람들의 말과 고백을 통해서는 그들 마음의 내면적 상태에 대한 지식을 얼마나 불확실하게 얻을 것인가를 알 수 있다. 그 점은 또한, 어떤 사람의 종교적인 체험을 듣고, 그 사람이 정말 회심한 사람인지 확실하게 판가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장담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보여준다.

 

두 사람이 같은 어휘나 문구를 사용하여 자기들의 느낌을 표현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느낌이 유별나게 다를 수 있다. 두 사람 모두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 속에 흘러넘치는 걸 느낀다”고 말했다 하자. 그런데 그 경우에 한 사람은 그 말로 진정한 종교적 정서를 묘사했으나 다른 사람은 자기가 하늘의 은총을 입었다고 자기 나름으로 확신하고 느낀 본성적인 감정의 변화를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또는 심리적인 요인 때문에 갑자기 기분이 크게 좋아진 것을 그렇게 표현할 수도 있다. 일반적인 차원에서 보면 그러한 어투는 진지하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다시 말하면 두 사람 다 살아 있는 정서를 진정으로 체험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둘 다 명백한 사실을 표현하는 걸로 인정한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는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지만 후자의 경우는 중생치 않은 상태에 있을 수 있다.

 

어떤 사람의 체험을 듣고서 그 사람의 진정한 영적 상태를 분명하게 가름할 수 있다는 어리석은 장담을 파쇄시키기에 합당한 또 다른 요점이 있다. 그것은 진정으로 경건한 사람이 사용할 수 있는 어휘나 문구를 가식적인 외식자가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참된 그리스도인들이 자기들의 체험을 진술할 때 사용하는 언어와 어투를 모방하지 못하게 할 것이 무엇인가? 거짓된 신앙고백자가 종교적인 자서전에서 풍성하게 발견할 수 있는 경건한 행사의 묘사와 진술을 따서 자기들이 그러한 것들을 체험한 양 말하려 할지라도 그것을 무슨 수로 막을 수 있는가? 여기서 두 부류의 그리스도인들만 언급하고 있지만, 각 경우마다 세분하여 많은 등급으로 나눌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그 모든 세세한 류의 그리스도인을 다 언급하자면 지루할 뿐더러 덕(德)스럽지도 못할 것이다. 독자들은 보편적인 원리들을 이러한 이유로 야기되는 체험의 모든 다양성에 재빨리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이상의 논평에서 건전하고 체질적인 기질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영적 의사가 다루어야 하는 양심의 문제에 있어서 가장 비통한 ‘경우’는 병적인 기질로부터 오는 것이다. 누구라도 자기들의 영적 고통의 문제를 숨기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무서운 병적 우울증에 습관적으로 시달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를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어떤 사람의 경우에는 이 질병이 지속적이라기보다는 간헐적이다. 그런 사람들은 어떤 주기를 두고서만 깊은 종교적인 침체의 증상을 나타낸다. 그들의 경우는 마치 어둡고 구름 낀 날이 금방 아주 맑은 날로 변함으로 얻어지는 상쾌함과 같은 것을 맛볼 수 있는 경우라 말할 수 있다. 그들의 그 음울함이 계속된다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압도당할 것이다. 그러나 어두운 밤이 지나면 구름 한 점 없는 사랑스러운 아침이 열린다.

 

아키발드 알렉산더, <영적 체험, 회심에서 임종까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