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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ity

어린이들의 구원 문제

모태로부터 거룩함을 입은 사람이 있느냐는 문제는 흥미롭다. 인간 존재의 시초부터 은혜의 교통이 있었다면, 지금도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내가 너를 복 중에 짓기 전에 너를 알았고 네가 태에서 나오기 전에 너를 구별하였고 너를 열방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렘 1:5)고 말씀하셨다. 가브리엘 천사는 사가랴에게 그의 아들 세례 요한에 관하여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입을 것이라”고 말하였다(눅 1:15). 선지자 사무엘도 아주 어릴 때부터 여호와를 두려워한 것 같다. 그 후에도 탁월하게 경건한 사람들 중에 구주를 사랑하지 않거나, 자기 죄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슬퍼한 때를 만나보지 못한 이들도 흔하다.

 

어린이에게는 부패함이 없는가, 그들도 중생하는가?

 

우리가 영아들도 중생(重生)할 수 있으며, 영아라도 중생해야만 구원받는다는 걸 믿는다면 어릴 때부터 중생하여 성년에 이르는 일이 어째서 불가능할 것인가? 내가 알기론, 많은 사람들이 영아들은 천성적으로 도덕적 오염을 받지 않고 태어나니 중생이 필요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견해는 성경 교리에도 위배되고, 영아들이 도덕적 행동을 하게 되자마자 누구나 다 그릇 행하고 하나님께 죄를 짓는다는 기정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만일 어린이들이 부패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법을 즐거워할 것이다. 그러나 사실은 정반대다.

 

아주 어린 나이에 중생하는 사람이 그렇게 소수에 지나지 않는 이유는, 은혜가 본성을 따라 주어진다는 견해냐 사람이 날 때부터 부패한 것은 아니라는 견해를 인정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날 때부터 거룩하게 구별되는 이가 없다는 견해를 취한다. 그런 사람들은, 단순한 도덕주의자들이나 종교적으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의 기억으로 미루어 볼 때, 삶의 어떤 부분에서도 특별한 변화를 경험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은 하나님께 속하여 태어났다는 소망에 도취되어 있을까 두려워하는 것이다. 물론 교리를 이처럼 남용하는 사례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건전한 교리라도 남용될 수 있음을 증거하는 실례밖에는 다른 것이 아니다.

 

어떠한 은혜의 교리라도 그처럼 남용된 적이 있었다. ‘만물보다 심히 부패한 인간의 마음이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그런 일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회개는 하지 않고 있으면서 자신들은 어린 영아기에 중생했다는 관념을 가지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자들을 위한 근거는 없다. 왜냐하면 어린이의 경건도 성인의 경건만큼 명백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어린이가 이성을 행사하기 시작하자마자 그 경건의 모습을 분명히 드러낸다. 어떤 국면에선 경건한 어린이들이 소수에 지나지 않고 성년에 이른 사람보다 성품상으로 더 단순하고 덜 외식적이기 때문에, 어른들보다 그 경건이 더 잘 두드러져 보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큰 죄는 범하지 않고 외면적인 행실이 예의 바르다고 해서 그것이 중생의 증거는 될 수 없다. 거만하고 자기 의의 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종교를 철저하게 반대하는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서도 그러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종교 교육이나 선한 본을 통하여 그러한 외면적인 진지함과 단아함을 얻을 수 있다. 그런 경우에라도 참된 경건의 내면적 특징들을 하나도 발견치 못할 수도 있다.

 

 

어린이에게는 아이다운 경건을 찾아야

 

어찌나 이른 시기에 은혜를 받았던지 그 은혜의 최초 표증들을 기억할 수 없는 어느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런 경우에 그 사람에게 은혜가 있음을 보여 주는 증거들로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신앙적인’ 그 어린이에게서 어른들이 가진 지혜나 판단력이나 견고함이 있는가 찾아보려고 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어린애다운 경건, 마음의 단순성과 열심과 온순한 상태를 기대해야 한다. 그러한 어린이가 하나님을 창조적이요, 보존하시는 분이요, 은혜를 베푸시는 자로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자기의 구주, 피를 흘리사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신 구주로 생각하기 시작하자마자 그 어린이는 그 진리들을 통하여 신앙적으로 감명을 받을 것이며, 자기가 가진 진리의 개념에 부합한 감수성과 마음의 정서를 나타내는 표증을 보여줄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러하듯이 그러한 어린이도 죄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실수를 알고나서는 예민한 양심으로 그걸 슬퍼할 것이며, 또 죄를 지을까봐 두려워할 것이다. 기도란 의무임과 동시에 특권임을 배우게 되면 그 어린이는 즐겁게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갈 것이고, 근실하게 그 은밀한 의무를 수행할 것이다. 참으로 경건한 어린이는 부모나 선생들에게 애정어린 순종을 보일 것이다. 형제나 자매들에겐 친절하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도 친절을 나타낼 것이다. 그리고 죄인들이 회심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크게 기뻐하며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나라가 확장되는 일에 지대한 관심을 가질 것이다.

 

우리는 중생한 어린이가 진지한 주제들에 한결같은 관심을 보일 거라고 기대하지도 말아야 한다. 또는 그런 나이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쾌활함과 경솔함에서 벗어나리라고 기대해서도 안 된다. 다만 경건한 생각들과 어린 마음에서 본성적으로 흘러나오는 것들이 서로 어우러져서 본성적인 성향도 조절되고 기질도 부드러워지며 완화될 것을 기대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섭리로 그러한 어린이가 세상을 떠나게 될 때 보통 그들의 경건이 불꽃을 일으킨다. 그리고 이 어린 성도들이 신적 은혜의 감동을 받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확신을 깜짝 놀랄 정도로 말하여 성인 그리스도인들을 부끄럽게까지 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경우를 보여주는 많은 실례들을 기록에서 발견한다. 그러한 실례들 속에서 참된 경건의 증거가 최대한으로 강한 모습을 드러낸다. 이러한 어린 은혜의 싹들 속에 부드러움뿐 아니라 아주 특이한 아름다움이 들어 있다. 간단히 말해서 은혜의 역사는 성인에게서나 어린이에게서나 같은 모습을 보인다는 말이다. 다만 그 어린이의 성격이나 자식의 차이 때문에 제한을 받는 것뿐이다.

 

여러 해 동안 은혜를 받은 성인들 중에도 지식이나 총명에 있어서 어린 아이 같은 자들도 많다. 우리가 판단하여 보건대 성인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도 어린이들과 같은 수준에 머물러 여러 해를 지나는 수도 있다.

 

자기들이 언제부터 신앙을 갖기 시작했는지 정확히 꼬집어 말할 수는 없으나 마음의 변화를 보여 주는 다른 모든 증거를 소유한 사람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이러한 글을 읽고 낙담하지 말고 오히려 그처럼 일찍 큰 목자의 사랑스러운 보호를 받게 되고, 다른 사람들과 똑같이 본성적으로 범할 수 있는 많은 죄를 짓지 않도록 보호받은 걸 감사하라.

 

아키발드 알렉산더, <영적 체험, 회심에서 임종까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