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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ity

은혜 안에서 자라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한 권고

기독교에서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고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습니다. 여타의 종교들이 대부분 행위를 앞세우는데 비해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라는 교리는 기독교를 구별되게 합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런 의문이 들 수 있습니다. ‘어차피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이고 사람의 노력은 아무런 소용이 없으니 우리는 그저 가만히 앉아서 하나님이 구원을 주실 때까지 기다리면 되지 않은가?’ 이 생각을 발전시켜 나타난 것이 소위 정적주의(Quietism)라 불리는 것으로 ‘어떠한 은혜의 방편도 사용하지 않고 오로지 가만히 구원을 기다려야 한다’는 주장을 펼쳤습니다. 그러나 감리교의 창시자인 존 웨슬리를 비롯한 많은 목사들은 이런 관점이 성경적이지 않다고 판단했습니다. 아래의 글은 알렉산더 목사가 은혜 안에서 성장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위해 조언한 것들인데 적극적으로 은혜의 방편들을 사용할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하면 은혜 안에서 자라나며 경건의 진보를 이룰 수 있는지 실제적인 몇 가지 방안을 제시하고자 한다.

 

진보 위해 끊임없이 열정적으로 노력을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열정적으로 계속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하나의 공리(公理)로 전제해두어야 한다. 그러한 목표에 이르기를 소원하고 추구해야 할 뿐 아니라,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추구해야 한다. 우리의 주의를 빼앗는 다른 어느 것보다도 더 우선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성령의 도움 크심을 항상 깨달아야

하나님께서 성화의 방편으로 지정한 것들을 사용함에 있어서 주도면밀하려면,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일의 어떠한 효과도 기대할 수 없다는 걸 언제나 깊이 명심하고 있어야 한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 3:6)라는 구절은 그래서 중요하게 느껴진다. 옛 성도가 제안한 한가지 방안은 훌륭하다. “자신의 노력으로 구원을 얻으려는 것처럼 방편들을 열심히 사용하라. 그러면서도 방편을 하나도 사용하지 않는 것처럼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매달리라.”

 

추상적인 사변들을 피하라

성경을 깊이 상고하고, 구속의 계획에 대한 명백하고 일관성 있는 관점들을 얻도록 노력하라. 진리를 그 본질에 부합하게 숙고하는 법을 배우라. 오로지 경건하고, 한번에 오래도록 진리가 영혼에 인상을 남길 수 있도록까지 깊이 묵상하라. 계시되지 않은 것들에 대한 호기심어리고 추상적인 사변들을 피하도록 하라. 변론정신에 빠지지 말라. 많은 사람들은 진리가 남기도록 되어 있는 선한 인상의 유익을 놓치고 만다. 진리를 그 본질에 부합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어떤 논란을 야기시키는 문제나 어떤 다른 문제와 연관시켜보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름다운 지평선을 보고 진정한 인상을 받을 때, 자기가 보는 지역에 있는 식물의 성격이나 목재의 가치나 토양의 비옥도에 대한 사소한 의문거리로 주의를 돌리지 않아야 한다. 오직 그 사람은 자기 앞에 있는 여러 경관들이 한데 어우러져 자연스럽게 풍기고 있는 인상을 받을 준비를 위해서 마음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한 경우에 지성적인 행사를 아무리 한다 할지라도 효과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한 모든 능동적인 애씀은 별로 좋지 않고, 다만 생각을 바른 위치에 두기만 하면 된다. 그 인상이 가장 완전할 때, 마치 우리는 그 효과를 수동적으로만 받는 사람 같은 느낌을 가진다. 하나님의 진리에 의해서 마음의 인상을 받는 방식도 그와 두드러진 유사성을 보인다. 진리에 의해서 바른 인상을 받기 가장 쉬운 사람은 비평적이거나 사변적이거나 변증적인 신학자가 아니라, 겸손하고 단순한 마음을 가진 묵상하는 그리스도인이다. 성경을 비평적으로 연구하는 것은 필요하다. 그리하여 성경을 반대하는 자들을 맞서 진리를 변호하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가장 학식 있고 비평적이고 가장 심오한 신학자도 어린 아이의 정신을 가지고 예수님의 발 앞에 앉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들의 연구를 통해 덕(德)을 얻기가 어렵게 된다.

 

기도처럼 그 응답이 약속된 복락은 없다

성령의 감화를 위해서 부단하고 열렬하게 기도하라. 이러한 기도처럼 특별하고 강조적으로 그 응답을 약속한 복락이 없다. 만일 이러한 신적 은사를 받아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로 자기 속에 두기를 원한다면, 기도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마음이나 생활에서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시킬만한 것은 어느 것이든지 피하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악한 생각과 악한 상상이 일어나는 것을 통제하지 않고 거의 내버려두며 거기에 빠진다면 기도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악한 분노의 정욕이나, 교만이나 사악함에 자신을 방임하거나, 악한 말을 하지 않도록 자기 혀를 금하지 않는다면 기도한들 무슨 유익이 있겠는가? 양심적이 되기를 힘써 배우라. 다시 말하면 한결같이 양심의 지시를 순복하도록 하라. 많은 사람들은 어떤 일에는 양심적이나 다른 일에는 양심적이지 못하다. 자기 마음 속의 모니터인 그 양심이 중요한 일을 지시할 때는 순종하나 보다 더 작은 일에 있어서는 양심의 소리를 묵살해버리는 수가 흔하다. 그리고 현재 당장 급한 일로 기울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러한 사람들은 은혜 안에서 자라날 수 없다.

 

자기 영혼 살필 시간적 여유를 가지라

‘은밀한 중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할 시간을 좀더 많이 가지고, 영혼의 상태를 들여다볼 시간을 가지라. 그럴만한 시간이 없으면 매일 덜 자고라도 그런 시간을 마련하라. 영혼의 관심이 제자리를 벗어나기 쉽고, 철저한 자기 긍정을 위해서 하루에 한 시간 이상의 시간이 필요할 때, 정기적으로 그럴 필요는 없지만 필요에 따라서 몇 날을 떼어 금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겸비한 자세를 취하라. 이러한 기회를 맞을 때마다 자신을 신실하게 다루어라. 은밀한 모든 죄를 다 찾아내 회개하려고 무진 애를 써라. 하나님과의 언약을 새롭게 하고, 신적 은혜의 능(能)을 힘입어 자신이 새로워지겠다는 거룩한 결심을 하라.

 

만일 자기를 검증해본 결과 어떤 죄악적인 일에 빠져서 살았던 것을 발견하면, 가장 핵심적인 상처의 응어리를 찾아내어, 그 실수를 하나님 앞에 아뢰고, 피뿌림을 얻기까지 쉬지 말라. 자기 속에 그러한 궤양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자라지 않느냐고 물어볼 필요가 없다. 두려워해야 할 일은, 악의 뿌리이다. 자기가 즐기고 있는 죄를 철저히 뉘우쳐 버리지 않거나 양심이 효과적으로 정결케 되지 않는 한, 여전히 그 상처는 계속 쏘는 아픔을 느끼게 한다. ‘죄와 더러운 것을 씻기 위하여 열어 놓으신 샘’으로 나아오라. 그리고 그대의 사정을 위대한 의사이신 그분께 아뢰어라.

 

 

연약한 양들의 거침돌이 되지 않을까 염려하라

늘 하던 것보다 더 많이 형제 사랑을 계발하고 행사하라. 그리스도께서 신앙이 있다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 때문에 불쾌하신데, 그 이유는 지상에 있는 그리스도의 지체들에 대해 냉담하고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일에 너무 인색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경우에서는 양떼 중 연약한 자의 거침돌이 되기도 하며, 삶의 모습과 행실이 덕을 세우지 못하고 오히려 그 정반대가 되기 때문이다. 아마 이러한 제자들은 가난하며 낮은 지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서 자기 아래 있는 사람으로 깔보기 쉽다. 그러한 경우라면 만일 그리스도의 때에 살았다면 그대는 그리스도 자신을 그처럼 대접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가난한 자들과 고통 당하는 자들과 함께 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는 부자 성도들보다도 가난한 성도들을 무시하는 것을 더 불쾌하게 여기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마 그들은 그대의 편이나 종파에 속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대는 다만 여러분 자신의 교단만을 세우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리스도께서 죄지은 사마리아 여인을 다루시기 위해 어떻게 자신을 낮췄는지 기억하라. 그리고 가나안 여인을 향하여서 그리스도께서 취하시는 낮은 자세를 생각해보라. 그리고 마지막 심판 때를 무어라 말씀하셨는지 생각하라. 마지막 대에는 주님께서 자기의 비천한 제자들에게 행한 모든 것과, 아니면 그 제자들에게 마땅히 해야 하는데도 무시한 모든 것을 다 밝히실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 사이보다 더 그리스도인다운 대화와 우정어린 교제가 있어야 한다. 옛적에 하신 말씀을 들어보라. “그 때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이 피차에 말하매 여호와께서 그것을 분명히 들으시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와 그 이름을 존중히 생각하는 자를 위하여 여호와 앞에 있는 기념책에 기록하셨느니라”(말 3:16).

 

주께 드릴 것 위해 열심히 일하라

만일 더 큰 경건을 소유하려고 부지런히 애쓰고 있다면, 지상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리스도의 나라의 잘됨을 위해서 이전보다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교회가 이러한 목적을 성취시키기 위해서 짜놓은 모든 계획에 더 생동감 있고 더 깊은 느낌을 가지고 참여해야 한다. 이제까지 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드려야 한다. 어떤 신앙고백자들이 주님께 자기 소득 중 얼마나 작은 부분을 드리는가 생각하면 부끄러운 생각이 든다. 십일조는 고사하고라도 첫 열매의 한 다발 곡식단에도 미치지 못할 것을 주님께 드리고 있다. 드릴 것이 없으면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열심히 일하라.

 

새벽 일찍 일어나 무엇인가를 하려고 애를 쓰라.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필요로 하시기 때문이다. 함께 곡식을 팔아 주님의 창고에 돈을 드려라. 초대교회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집과 땅을 팔아서 사도의 발 앞에 두었다. 주님이나 가난한 자들에게 줌으로써 자신이 가난하게 될까봐 무서워하지 말라. 주님의 말씀은 어떠한 계약조건보다 좋다. 주님께서는 “내가 갚으리라” 말씀하신다. “식물을 물 위에 둔지라, 그리하면 몇 날 후에 그것을 도로 찾으리라.” 멸망해가는 이방의 지역에 성경을 보내고 선교사들을 보내며 헌금들을 보내라.

 

의식주 전반에서 신자답게 단아하게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라. 그대의 소욕을 제어하라. 세상을 따라가지 말라. 옷이나 집이나 가구는 그리스도인답게 평범하고 단아하게 하라. 범사에 사치나 치장을 하지 말라. 분별력 있게 가정을 다스리라. 원수를 용서하고 위하여 기도하라. 편당에 빠지지 말라. 열심히 자기 일을 하되 마땅한 원리를 따라서 하라. 분명하고 확실하게 생각하라. 할 수 있는 한 모든 사람들과 화평을 누리며 살라. 부르짖는 기도에 열심을 내라. 근신함으로 마음을 지키라.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 속에서 영적인 유익을 도모하도록 하라.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긍휼에 대해서 열심히 감사하라.

 

연단 받는 중에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은혜 안에서 더 빨리 자라게 하기 위해 그대들 중 어떤 사람들은 환난의 용광로 속에 던져질 것이다. 질병과 사별, 자녀들이나 친척들의 악한 행실과, 재산의 손실이나 명예를 훼손당하는 일 등이 예기치 않게 그대에게 밀려와 무겁게 짓누를지 모른다. 이러한 그대를 시험하는 환경들 속에서 참고 믿음을 굽히지 말라. 그 환난을 제거해 달라기보다는 그 환난을 통해서 거룩함을 입기를 더욱 열망하라. 모험의 불 속에 있는 동안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라. 그처럼 연단 받는 믿음은 보통 순결하고 보배로운 믿음이기 쉽다. 그리스도로부터 마땅히 어떻게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를 배우라.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복종할 것을 목표로 삼으라. 수군거림이나 불평하는 정신에 빠지지 말라. 약속을 확신하고 붙잡으라. 모든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라.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하나님께 아뢰라. 세상을 붙잡은 손을 놓으라. 사망과 무덤에 대해 자주 생각하라. 그대가 변하기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라.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면 더 이상 하루라도 살 마음을 먹지 말라.

 

만일 우리가 깨어 있으면 조금도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좋은 것들을 발견할 때가 자주 있을 수 있다. 나는 어떤 목적을 위해서 달력을 보는 일은 드물다. 그러나 달이 밝아지는 때를 알아보기 위해서 이번 달의 달력을 열어보았다. 그랬더니 가장 먼저 내 눈에 띄는 것은, ‘은혜 안에서 성장하는 것을 저해하는 것들’이라는 이 글의 주제로 잡아놓은 글 속의 한 문단의 제목이었다. 물론 나는 그 짧은 문단을 유심히 숙고했다. 나는 그것을 읽고 어찌나 좋았던지 그것을 내 본문으로 삼기로 했다 - 여기서 그것을 소개하고자 한다.

 

“세상 친지들과 동료들의 영향 - 사업에 너무 깊이 몰두하는 것 - 이득을 얻기 위해서 협잡꾼과 가까워 지는 일 - 재미있는 일을 위하여 너무 많은 시간을 보내는 일 - 세상의 것을 절제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일 - 불신앙적이거나 신실하지 못한 목사의 지도를 받는 일 - 형식적이고 외식적으로 종교적인 의무들을 수행하는 일 - 그리스도인 친구들의 모임이나 종교적 교제를 멸시하는 일 - 아는 죄에 미끄러져 빠지는 일 - 이미 얻은 은혜를 조금도 활용하지 못하는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