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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ity

리처드 힐(Richard Hill) 경의 거듭남 체험

아래의 글은 리처드 힐이라는 그리스도인이 체험한 거듭남의 경험을 알렉산더 목사가 자신의 책에 옮겨 기록한 것입니다.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이 사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에서 영영히 떨어져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 때문에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에 평안이 없었고 어떤 경우에는 무서운 공포를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마지막에 누린 복락은 이런 마음의 고통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습니다(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후 7:10).

 

 

     마귀도 항상 새 수법을 연구해 사용

자기 자신의 회심에 대한 의견을 여러 번 바꾸는 사람들을 나는 자주 만나보았다. 그러한 사람들은 자기들의 감상이 더 올바르게 되며 성숙하게 되었을 때 자기들의 체험의 여러 다른 단계들을 가늠해 보며 회심의 때를 달리 생각한다. 처음에는 보다 밝은 빛을 비추었던 회심자들이 몇 년이 경과한 뒤에 언제나 아주 좋아 보이는 것만은 아니다.

 

리챠드 힐(Richard Hill) 경은 자기 스스로 자신의 체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진술하고 있는데, 에드윈 시드니가 쓴 그의 자서전에 게재된 것이다. 그 부분은 런던에서 발행되는 <크리스챤 옵저버>지(1839년 9월호)에 인용되어 실렸었다. 이런 류의 독서에 맛을 들인 모든 사람들은 이토록 흥미 있는 보고서를 자르지 않고 전체 그대로 싣는 것을 만족하게 여길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그 인용구가 길다는 데 대해 주저되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신적 광명의 여명(黎明)이 내 영혼 속에 처음 밝혀질 때가 언제인지 알아 맞히기는 용이한 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내가 특별하게 기억하는 한가지 일은, 여덟 살이던가 아홉 살 되던 해인 어느 날 주일 저녁, 이웃에 있는 학교에서 몇몇의 다른 소년들과 함께 선생님에게 교리를 암송해 보이고 있었다. 그때 내 마음이 하늘에 속한 것들을 향하여 이상하게 끌리는 걸 발견하였고, 하나님의 사랑이 진하게 느껴져 그밖에 다른 어떤 것은 싱겁고 별 의미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것은 하늘에 속한 은사가 간헐적으로 잠깐 동안 비쳐진 것에 불과하였다. 주일학교 동급생들과 함께 그 주일학교가 파하자마자 내 종교적인 인상은 사라졌고, 나는 다시 그전과 똑같은 열망으로 다시 어리석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나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으셨다. 나는 가끔 양심의 가책을 느꼈고, 죽음에 대한 생각들이 자주 내 마음 속에 강하게 파고들었다. 나는 그 학교에서 2년 동안 머물렀다. 그 후 나는 웨스트민스터로 이사 갔는데, 거기서 죄에 대한 깨달음이 나를 여전히 괴롭혔고, 나로 하여금 피상적인 회개와 결심을 여러 번 하도록 강요했다. 그러나 내 힘으로 한 일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모든 것들은 아무런 열매를 거두지 못했다.

 

웨스트민스터에서 4, 5년 쯤 되었을 때, 여러 명의 내 학교 동급생들과 함께 견진(堅振)을 받아야 했다. 나는 이 일을 새로운 상태로 들어가는 것으로 간주했고, 그래서 새로운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가장 엄숙한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내 행복과 회심은 내가 늘 생각해 왔던대로 그렇게 쉽게 시작되지 않았다. 원수 마귀는 이제까지 썼던 계략으로써는 나를 더 이상 실제적인 악행의 상태에 머물게 할 수 없음을 알아차리고 또 다른 측면에서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곧, 하나님의 존재, 영혼의 불멸성, 성경의 신적 기원성 등과 같은 신앙의 가장 근본적인 요점들에 대하여 무서운 의심을 불러일으켰다.

 

 

     사랑의 표증과 의문이 계속 엎치락 뒤치락

나는 이 진리들에 대해서 내 스스로 믿음을 가지려고 애써보았지만 허사였다. 그러면서도 근본적인 진리들의 확실성을 내게 확신시켜 줄 어떤 책을 쉽게 얻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어느 목사 미망인으로부터 비버릿지(Beveridge) 박사가 쓴 <개인적 생각들>(Private Thoughts)을 비려 보았다. 나는 그때 그 부인의 집에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처음 그 놀라운 책의 몇 페이지를 읽어 주었다. 내 기억을 다시 잘 되살려 보니, 그녀가 그 책을 읽고 있는 동안 정말 영광스러운 빛과 위안이 즉시 내 영혼 속에 파고들어서 도저히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 마음 가운데 부은바 되었고, 나는 말로 할 수 없는 희락과 충만한 영광으로 기뻐했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이러한 위안들이 반 시간도 계속되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30분 동안도 못되어 그 감격은 차차 사그라들어 예전에 가졌던 의문이 또 고리를 물고 일어났다. 그럴 때 나는 다시 비버릿지 박사의 그 책으로 돌아가거나, 종교의 주제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렇게 할 때마다 하나님의 사랑의 표증들을 똑같이 체험했다. 어떤 때는 그러한 체험이 오래 지속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더 짧게 끝나기도 하였다.

 

결국에 나는 이러한 불확실한 상태에 대해서 진력이 나기 시작했다. 특히 내가 전에 느꼈던 위안이 점점 사그라들어 희미해졌을 때 그러하였다. 이에 덧붙여 내 학교 친구들이 보이는 나쁜 행동들과, 계시된 종교뿐만 아니라 자연 종교로 불리우는 것이, 진리에 대해 만족을 얻으려는 과정에서 느껴지기 시작한 절망감이 적지 않게 내 종교적인 탐구의 정신을 불식시켰고, 젊음과 강한 정욕으로 충동 받는 많은 죄악에 떨어지게 했다. 내 속에 있는 것들로부터 생각을 돌릴 모든 기회를 포착하고 싶을 때마다 더욱 열심히 그렇게 했다.

 

열 여덟 살 쯤 되었을 때라고 생각한다. 웨스트민스터에 있는 그 학교를 다 마치고 옥스포드의 맥달렌대학에 입학했다. 거기서 나는 4, 5년 동안 계속 공부를 했다. 그런 다음에 해외에 2년 이상 체류하다가 1757년 영국으로 돌아왔는데, 그때 나이가 23, 4세 쯤이었다. 옥스포드와 해외에 머무는 기간 동안, 나는 모든 고통을 불사하고라도 양심을 잠잠케 하려고 애썼지만 내 죄책감은 여전히 나를 따라다녔다. 불의를 더 깊이 들이마심으로써, 내 영혼의 생각들을 내게서 떠나보내려고 하면 할수록, 모독 받은 성령께서는 더 강하게 나를 설득하셨고, 때로는 죄를 짓는 그 행동 속에서도 내 육신적인 만족을 흐트러 놓으시고, 정말 생각하기에도 끔찍할 정도의 깊은 가책감으로 나를 치셨다! 나는 심지어 하나님 앞에 불만을 토로할 마음을 먹기도 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시고, 또는 내 동료들은 참으로 재미있어 하면서 죄를 짓는데도 왜 나에게는 그러한 걸 허락지 않으시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넘어질 때마다 더 큰 결심으로 일어섰다

그러나 영원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신 그분은 나를 향하여 긍휼어린 생각으로 이 모든 일을 행하셨으며, 그의 인애하심을 나에게서 멀리 옮기지 않으실 참이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나를 향하여 은혜로우시기 위하여 기다리셨다. 그리고 뚜렷하고 집요한 죄책감으로 나를 괴롭혀서 내가 무릎을 꿇고 때로는 한 달 동안 내 죄를 끊도록 강권하시기도 하셨다. 또는 3, 4개월 동안 그러한 일을 하도록 강력하게 역사하셨다. 내가 그렇게 보는 이유는, 종교의 진리에 대해서 의심으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계시고 내세가 있다면,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진실로 참된 메시야요 그를 복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을 주시는 분이라면, 내가 처한 이 상태에서는 어떠한 수를 쓰더라도 구원받을 수 없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이 정말 그런지 그렇지 않은지를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내 영혼의 영원한 행복이나 비참의 문제를 우연으로 방치해 두는 것은 가장 정신없는 일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특히 종교의 진리를 인정하고 그 영향권 아래서 살아감으로써 내가 더 이상 버림받은 자가 아닐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방치해 둔다는 건 참 어리석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한 종교적 진리들이 거짓되다는 가정 아래 계속 죄를 짓는다면 내 실수를 후회하고 다시 고치려 하기에는 시간이 너무 늦어버린 때에 정말 치명적으로 실수를 범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걸 아울러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이러한 결론에 이르고, 그 결론의 타당성을 분명히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내 종교적인 기분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찾아오는 모든 시험에 대하여 성급한 반응을 나타내어 넘어지곤 했으며, 그전보다 더 지옥의 자녀처럼 보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넘어질 대마다 나는 영혼의 고뇌를 더욱더 크게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때마다 기도하고 결심을 새롭게 하였다. 그만큼 나는 내 자신을 정말 무서운 저주 속에 빠뜨리곤 했다.

 

그러나 안타깝다! 정말 안타깝다! 내 힘의 근원인 그분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내 자신의 연약에 대해서도 무지한 채 이러한 모든 일을 겪어내야만 했다. 그러므로 스스로 거룩해지려는 내 모든 노력이 좋은 성공을 거두지 못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마치 구스 사람의 피부를 하얗게 하려는 노력과도 같았다. 그러니 내가 시도하는 그러한 모든 것들은 아무런 목적을 성취하지 못하여, 수천 번 내 영혼을 기진시켰다. 차라리 그러한 엄숙한 서약을 하지 말았으면 나을 뻔하였다. 이러는 동안 내가 가진 종교적 개념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지난 죄를 도말하시고, 하나님께서 그러한 일을 하시기 위해 나서실 수 있도록 내가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이 종교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지옥을 빠져 나와 영생을 얻을 권리를 얻으려 애썼던 것이다.

 

 

     수많은 시련 끝에 하나님은 격렬한 방법 채택

이런 식으로 나는 계속 스스로 서약을 하였고, 또 그때마다 그 서약을 어겼으며, 죄짓고 회개하고, 죄짓고 회개하고 하는 일을 거듭 행해나갔다. 그러다가 가장 긍휼에 풍성하신 내 하나님과 구주를 바라보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부르셔서 나를 내버려 두지는 않으시겠지만, 의로운 판단을 내리는 것처럼 내 의지의 가공할 악을 억압하지는 않으실 것임을 알았다. 의로운 판단대로 하면 나를 거스려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느냐?’라는 무서운 선고를 내리셨을 것이다 -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이제까지 하신 것보다 훨씬 더 격렬한 방식으로 나를 다루기 시작했다. 그리고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공포로 내 영혼을 사로잡으셨다. 그래서 내 마음의 불안 때문에 소리지를 정도였다. 전능자의 화살이 나를 쏘아 넘어뜨렸고, 그 화살의 독이 내 심령을 사로잡았고, 지옥의 고통이 나를 삼켰다.

 

이 때가 1757년 10월이었다. 이때부터 죄가 치명적인 일격을 얻어맞았다고 말할 수 있다(내가 뜻하는 바는, 죄의 왕노릇하는 권세가 치명적인 상처를 받았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죄의 몸이 없어진 것이 아님을 아시기 때문이다). 그때부터 나는 매 순간마다 배가 파선하면 어떻게 할까를 염려하는 불쌍한 선원같이 염려하면서 일을 해나갔다. 나는 금식도 했고 기도도 했고 묵상도 했다. 성경도 읽고 교제도 나누었고, 많은 구제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이 내 영혼에 어떤 평안도 주지 못했다. 오히려 전에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을 알게 되었는데, 내 모든 행사가 죄와 불완전으로 가득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거기에다가 사단은, ‘네가 용서받을 수 없는 성령 훼방죄를 지었으니 네 은혜의 날은 끝났다. 그러므로 기도를 드려도 하나님은 듣지 않으신다. 네 기도는 입에 발린 가증한 중얼거림이요, 하나님께 혐오스러운 것이다. 심판의 때에 긍휼을 생각하는 것은 너무 늦은 것이다’는 등의 암시로 나를 맹렬히 공략했다.

 

내 가련한 영혼이 그때 겪은 그 무서운 고뇌를 생각만 해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없고 도저히 상상해 낼 수도 없을 정도였다. 어떻게 해야 할지, 누구하고 이 문제를 상의해야 될지 도저히 종을 잡을 수 없었다. 그러한 똑같은 경우를 조금이라도 체험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을 전혀 알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은 내가 처한 상황에 가장 큰 관심을 보여 주었고, 나를 소생시키기 위해서 처방책을 제시하였다. 함께 어울리기도 하고 운동경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들의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서 그런 일에 응하기는 했다. 그러나 내 문제는 몸에 속한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확신하는 것처럼 그러한 육신적인 활동을 통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릇된 구원의 인식이 방황을 깊게 만들어

그러나 언젠가 한번 존 플레처(John Fletcher) 목사가, 내가 듣기로는 매우 퉁명스러운 자세로,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적 정신의 향기로 보이는 것들을 말하는 걸 듣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내 사정을 그에게 말해야겠다고 결심했다. 내 이름은 밝히지 않고 편지로 내 처지를 써 보냈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위해서 내 가련하고 침체되고 절망적인 영혼에 위안의 말씀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요청했다. 이 요청에 허락하신다면 살롬에 있는 여인숙에서 그날 밤 만나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때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당시 그 플레처 목사는 내 이웃의 젊은 신사들에게 개인수업을 시키는 가정 교사였는데, 그 이후 매들리의 교구목사로 일했다.

 

플레처씨가 거기까지 오려면 4, 5마일은 걸어야 했지만 약속시간에 잘 맞추어 그곳까지 나와서 매우 위안어린 자세로 나에게 말해 주었다. 그리고 내 자신이 써 보낸 것을 통해서 내가 어떤 상태에 빠져 있는가 여러 가지 생각을 해보았다고 말했다. 우리가 서로 얘기를 나누고 헤어지려 할 때 그는 나와 함께 기도했다. 그가 나를 위해서 기도한 것 가운데, 내가 내 자신의 의(義)를 믿지 않도록 해주십사는 내용이 있었다. 나는 그 표현을 듣고 그것이 무슨 뜻인가를 그 플레처 목사에게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그 기도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지 못했다.

 

 

플레처씨와 대화를 나눈 뒤 나는 그전보다 편해졌다. 그러나 내 공포감이 잦아든 것도 불과 며칠 밖에는 계속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플레처씨가 나더러 자신에게 적용시키라고 하면서 주신 약속의 말씀들과 위안들이 죄인들에게 일반적으로 해당됨을 인정하겠지만, 아직도 그것들이 나 개인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 같은 무서운 낙심자, 은혜의 날을 떠나보내고 죄를 짓되 더 이상 긍휼을 받을 수 없는 지점에까지 나아간 이런 나를 위해서 그 말씀이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더구나 그러한 것들은 그러한 것들을 적용할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밖에는 효력이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을 내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 믿음도 가지고 있지 않으니 그런 것들이 내게 소용이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다시 플레처씨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기억하는 한에서 소상히 밝히자면, 다른 사람들이 그러한 성경말씀을 통해서 위안을 받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아들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은 나 같은 사람에게는 그 말씀들이 하나도 해당되지 않으며,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고 짐짓 죄를 범한 나 같은 사람과는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또한 나는 지극히 악하고 강퍅한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했노라고도 말했다. 내가 행하는 모든 의무들은 심판이 무서워 행하는 노예적인 정신에서 나온 것이지 믿음과 사랑의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므로 얼마나 결함이 많은지 모른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나의 모든 의무들을 받아들이시는 것은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한다고 그 편지에 썼다.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했을 때 위로의 빛이

이 편지를 받고 플레처씨는 자비어리고 동정심어리게 즉시 답장을 보냈는데, 정말 위안에 찬 부드러운 편지였다. 그 내용은 대충 이러하였다. ‘내가 당신이 보내는 편지를 자세히 읽어보니 주께서 당신의 영혼을 위해서 얼마나 큰 일을 하셨는지 알고 기쁨의 눈물을 흘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당신이 행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기에는 부족하다는 걸 체험적으로 확증케 하셨으며, 예수님의 피를 믿는 구원받을 만한 믿음의 필요성을 인식시켜 주셨습니다.’ 그는 또한 <핼리벌톤씨의 생애와 죽음>이라는 책을 내게 보내 주었다. 핼리벌톤씨는 성 앤드류대학에서 신학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나는 최대한의 열심을 기울여 그 책을 찬찬히 읽었다. 핼리벌톤씨가 자신에 대하여 보고한 그 내용은 내 자신의 체험과 아주 방불해 보였다. 그래서 나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면, 핼리벌톤씨를 위해서 그처럼 강력하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시고, 핼리벌톤씨를 모든 고통에서 건지셨던 바로 그 하나님께서 나에게도 똑같은 일을 하실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이러한 압박을 받으면서 어떻게 지탱해 나갈 수 있었는지 알면 여러분은 놀랄 것이다. 내가 지금까지 얘기한 것으로는 그 압박감의 반도 나타내지 못했다. 만일 내게는 모든 것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을 바로 그때에 위안을 주는 소망의 빛이 쏘이지 않았더라면 나는 도저히 그 상황에서 자신을 지탱할 수 없었다. 그것이 내가 온전히 기진하는 것을 막아주었다.

 

1757년 9월에서부터 58년 1월까지 나는 이러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1758년 1월에, 그때 옥스포드의 베네리안 교수가 관습법에 대한 일련의 특강을 한다는 것을 알고, 그곳에 가보기로 마음의 결심을 굳혔다. 내가 그 강좌에 꼭 참석해야 한다는 어떤 소원에서 그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런 것에 대해서 마음을 쓸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학에 내가 혼자 쓸 독방을 마련해야겠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자 있을 기회를 많이 갖게 된 것이고 내 자신이 생각하는 것들을 곰곰이 더 생각해 볼 기회를 가진 것이고, 주님을 더 열심히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셈이다. 그러다가 내가 주님을 발견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으련가, 그래서 내가 대학에 이르렀을 때, 여러 시간의 강좌에 몸을 끌고 다녔지만 내 가련한 영혼은 무거운 짐을 지고 항상 마음을 쓰게 했다.

 

 

     거지처럼 미천한 내 영혼의 상태 깨달아

내가 당한 그 영적인 고뇌가 어찌나 날카로웠던지 길거리에 있는 거지도 바라보기가 어려웠다. 그 사람이 나보다 훨씬 더 행복해 보였고, 그 거지가 내 고난에 속해 있다면 그에게 처한 상황을 아주 기꺼이 바꾸어 주겠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오, 이러한 영혼들은 긍휼을 받을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가! 그들에게 소망의 문이 아직도 열려 있다. 그러나 나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나는 참으로 오랫동안 하나님을 거절해왔고, 이제 하나님께서는 사울처럼 나를 버리셨다. 내 은혜의 날은 지나갔고, 그 과거는 다시 찾아올 수 없다. 나는 모든 약속을 영원토록 저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내 생각이었다.

 

이러는 중에 나를 크게 놀라게 한 한가지 일이 있는데, 그것은 내 주위에 있는 세계가 그처럼 무관심하고 걱정을 전혀 하고 있지 않는 것 같이 보였다는 것이다. 특히 신학박사들 가운데 나보다 두 배나 오래 산 많은 사람들과 그 대학의 동료직원들이 그처럼 무심해 보일 수가 없었다. 내 생각으로는, 이 사람들이야말로 분명히 얼이 빠진 게 틀림 없다고, 그래서 땅의 일을 생각하며 육신의 정욕을 따르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영원한 행복이냐, 영원한 비극이냐가 그들 앞에 놓여 있으며, 살 날도 그리 오래 남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그들은 그렇게 무심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그리고 자기들의 영원한 상태가 현재 이 순간에 달려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들은 아주 태평해 보였다.

 

사순절 기간이 돌아왔다. 사순절 기간 중 첫 번째 맞는 주일이나 두 번째 맞는 주일에 멕달렌대학 채플에서는 언제나 성찬식이 거행되었다. 그래서 강하게 울부짖으면서 주님께 졸라댔다. 주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면 그 표증과, 주님이 사랑하시는 것에 대한 어떤 의식을 베푸시고, 나에게 다시 얼굴을 돌리사 정신을 차리고 주님을 그 성찬탁에서 기다리며, 그 예식을 통해서 참된 신자의 영혼 속에 전달하시려는 축복을 나도 함께 받게 해주십사고 간절히 간청하였다.

 

 

그의 거룩하신 이름을 영원히 영원히 찬미하리로다. 주님께서는 불쌍한 영적 가난뱅이의 기도를 거절치 않으셨다. 폭풍이 나에게 덮쳐 올 바로 그 순간에 내 기도에 응답하셨다. 나는 그 기도를 응답받았음을 의심하지 않는다. 적어도 주님의 의도(義道)를 위해서 주께서는 내 기도에 응답하시고, 첫날부터 주님께서는 내 마음으로 하여금 주님을 이해하고 추구하도록 인도하셨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내 영혼에 평화를 말할 적절한 시기가 언제임을 나 자신보다 더 잘 아셨다. 그래서 주님께서 나를 향하여 은혜를 베푸시기를 간절히 기다렸다.

 

 

     하나님의 자녀됨을 성령이 증거

주님께서 은혜를 베푸심으로 말미암아 나로 하여금 죄의 지극히 죄됨을 더욱 깊이 깨닫게 해주시기를 바랬다. 그리고 그 죄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그 황망한 처지를 더 깊이 인식하게 해 주시기를 바랬다. 둘째로는 나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나 자신을 천거하기에 합당한 어떠한 의(義)도 행할 수 없는 연약과 불충분성을 더욱더 체험적으로 깨닫게 해 주시기를 바랬다. 세 번째는 나를 더욱더 높여 주시며, 예수 그리스도와, 그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더욱더 열망하며 주리고 목마르도록 해 주시기를 바랬다. 이러한 제목들의 기도는 내 기억을 잘 더듬어 보면 2월 18일 토요일에 어느 정도 응답되었다.

 

그 밤은 성찬식이 베풀어지는 주일 전날이었는데, 주께서는 당신의 사랑을 그보다 앞서 몇 날 동안 맛보게 하신 후에 나로 하여금 심령의 침착한 분위기 속으로 인도하셨다. 그런 다음에 내 가련한 영혼으로 하여금 주님의 용서하시는 철저한 은혜와 긍휼에 대한 의식을 넣어주심으로써, 전에는 절망의 늪에서 두려워 떨고 있었던 내가 이제는 말로 할 수 없는 기쁨과 충만한 영광으로 즐거워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내게 주어진 성령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에 부은바 되었다. 그 하나님의 사랑은 두려움을 내쫓는 완전한 사랑이었다. 성령께서 친히 내 영으로 더불어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셨다.

 

한동안 이러한 느낌이 계속되었지만, 그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예민한 깨달음은 물러갔다. 그런 다음 내 마음은 냉정을 되찾고 내 소망은 살아 움직이게 되었다. 그러나 때때로 여전히 실수를 범하고 내 회심의 진실성에 대하여 여러 번 의심해 보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진지하게 내 상태를 점검해 보며, 성경이 은혜의 역사로 나타내고 지적하는 그것이 내 속에서 정말로 발견되는지를 진지하게 알아보았다. 이러한 점검을 할 때마다 윌리암 굳리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받기 원하는 자의 시련>이라는 놀라운 책에서 큰 도움을 얻었고, 안토니 팔머(Anthony Polmer)의 <복음적 새 피조물>(Gospel New Creature)이란 책에서도 큰 도움을 받았다. 여기에다가, 내가 런던에 있을 때 윌리암 로메인(William Romaine)이라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사역자의 설교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의 강론은 내 체험을 정확히 묘사하고 지적했기 때문에, 내가 진실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권세로 넘어갔다는 선한 확증을 받게 되었다.

 

런던에 머무는 동안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백성들 중 많은 사람들을 사귀게 하셨다. 나는 그 사람들에게 가장 친밀한 애정을 가지고 가까워졌다. 그렇다. 나에게 주 예수님의 신적 현상을 분별하도록 보여주는 그 모든 사람들에 대한 나의 사랑이 어찌나 컸던지, 요셉이 자기 형제들을 향하여 가진 마음의 간절함은 거기에다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 정도였다. 그들이 어떤 사람이든, 높은 지위에 있든 낮은 지위에 있든, 부자이든 가난하든, 무식하든 학식 있든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하나님께 난 사람들이 신의 성품에 참예한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이유를 가진다면, 그들은 다 동등하게 내게 사랑스러웠다. 내 마음은 지체 없이 그들을 받아들일 마음의 만반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가장 달콤하고 아름다운 교제를 하는 것이 즐거웠다. 물론 다른 모든 사람들은 그런 것이 지겹고 별 재미가 없었는데도 나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허위적대던 긴긴 세월 동안에도 주님은 항께 계셔

이후 2년여 동안은 그러한 찌르는 공포로부터 상당히 회복되었으며, 전에 압도당했던 그 비통한 절망에서 상당히 건짐 받았었다. 이렇게 말하면 당신들은 이렇게 논평할 것이다. ‘이 사람은 체제나 체험에 의존하며 살고 있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돌아오는 죄인들을 향하여 해놓으신 지극히 크고 보배로운 약속들보다 그 체험을 더 의지하는군’이라고 말이다. 사실 그렇다고 툭 털어놓고 말하고 싶다. 하나님께서는 곧 있으면 이 점에 대해서도 나에게 깨달음을 주신다. 왜냐하면 내가 그처럼 높이 평가하고 있는 이 위대한 위안들이 단순한 환각이나, 내 자신의 심령의 어떤 작용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하는 의문을 갖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이전이나 지금이나 별 다름이 없이 나는 악한 상태에 있는 것이다. 내 은혜는 이제는 나와 상관 없는 것이 되어버렸을 수 있고, 나에게는 ‘무서운 마음으로 심판과 불 같은 진노를 기다리는’ 것 밖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을 것이다.

 

1759년 4월인가 한다. 런던에서 스롭숴로 되돌아온 직후였다. 나는 그 스롭숴에서 거처를 정하자마자 플레처씨에게 편지를 써서 내 상태를 술회하였다. 이 일 외에 주님께서는 내 짐을 옮기시고, 종의 마음에서 나오는 그 무서운 공포심을 없애버리고 대신 하나님의 양자의 영이 다시 소생케 되는 아름다운 위안을 받게 하셨고, 복음 약속의 풍성한 보고를 열어 보여주셨다. 그리고 이제는 그 복음 약속이 내 소망의 근거가 되었고 필요할 때마다 내가 의지하는 것이 되었다. 이제는 내 자신의 불꽃을 의지하지 않았다. 이러고 나서 쿠퍼 감독(Bishop Cowper)과 함께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결코 지독한 공포를 체험하지 않았노라고 말이다.

 

내가 여러 번 넘어지고 일어서고, 많은 무거운 시험과 예리한 갈등을 겪었고, 영혼의 무미건조함을 많이 당했으며, 영적 죽음과 강한 부패를 만나 싸워야 했지만, 나는 언제나 주님이 그 고통 중에 함께 계셨다는 걸 발견하였다. 내가 언제나 필요할 때마다 주님의 은혜는 내게 넘쳤다. 이제는 나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모든 처사가, 내가 내 문제에 대해서 내 나름으로 생각하는 관념과 아무리 어긋나 보인다 할지라도, 어떻게 해서든지 내 영적 유익에 기여한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는 분명한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아키발드 알렉산더, <영적 체험, 회심에서 임종까지>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