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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ristianity

거듭남의 필요성을 비웃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

현대의 많은 교회들이 사람들을 교회로 이끌기 위해 잘못된 방법을 사용하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됩니다.  아픈 사람에게는 병이 나을 수 있다고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복을 받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교회로 모읍니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온갖 맛있는 간식을 주면서 교회에 오라고 합니다. 그러나 교회에 다니는데도 병이 낫지 않거나, 돈이 들어오지 않거나, 맛있는 음식을 못 먹게 되면 그들은 곧바로 발길을 끊습니다. 사람들을 교회로 이끄는 참된 동기는 하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필요로 하게 하려면 그들이 죄를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병에 걸렸다는 것을 알아야 병원에 가기 마련입니다.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올 지를 아는 목회자라면 결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죄에 대해 잠들어있도록 놔두지 않을 것입니다. 다음은 죄의 심각성을 무시하며 세상의 즐거움을 탐닉하는 사람들을 잠에서 깨워줄 수 있는 알렉산더 목사의 글입니다.

 

평안에의 안주가 진리를 외면케 하는 함정

 

에서는 생득적(生得的)인 권리를 가졌었다. 그러나 그는 이 특별한 축복을 멸시하여 ‘팥죽 한 그릇’에 그것을 팔아버렸다. 아브라함의 자녀들 가운데 이스마엘 같은 불신앙자가 나왔고, 야곱에게서 불경건한 자손들이 나왔다. 엘리의 아들들은 극히 악했고, 사무엘의 아들들도 ‘그 아버지의 그 아들’답지를 못했다. 우리는 다윗의 자녀들 속에서도 솔로몬밖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자를 만나지 못한다. 그러나 지극히 악하게 되었던 사람들이 흔히 성령의 강력한 역사를 거부했고, 또는 가장 하나님을 모독하며 불신앙에 빠져 하나님이 없다고 한 자들이 한때는 종교적인 느낌의 빛과 감화를 크게 받았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성령을 소멸하고 ‘거짓을 믿는 데로 나아가고 모든 악덕으로 부정을 행하여’ 결국 버림받았다. 그런 일이 드물지 않다.

 

가끔 죽음과 심판에 대한 생각 외에는 어떤 종교적인 인상들을 체험하지 않은 채 성인으로 자라나는 사람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매우 상냥한 성격을 지니고 도덕적으로 고아한 모습을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품이 종교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하는 원인으로 부분적으로 작용할 수도 있다. 그들은 큰 죄를 범한 적도 없고 양심이 크게 찔리는 일도 없다. 조용하고 만족할 만한 기질을 가지며 평안한 걸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종교적인 문제를 생각하는 일에는 질색이다. 강단에서 그들에게 진리를 전하면 생각을 얼른 그 진리로부터 다른 데로 돌이켜버린다. 이러한 류에 속한 어떤 사람들이 성년에 이르러서 각성을 하고 회심한다. 그리고 자기들이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생각하는 무신론자들로 이때까지 살아왔음을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 좀체로 쓸데없는 것을 생각지 않으려 한다. 물론 그들은 은밀한 기도를 전혀 무시해왔고, 복음의 빛 가운데서 살아왔으면서도 그 빛에 감동된 적이 없이 지나온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 종교 진리의 힘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은 류의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깨어 있는 모든 시간을 오락의 현란한 소용돌이 속에서 보내거나 아니면 친구들과 어울려 보낸다.

 

 

온전한 건강과 활기에 넘쳐 세상의 즐거움을 누릴 소망을 크게 기대하면서 심각한 생각을 즐거움의 적으로 알고 털어 없애버린다. 그들은 종교라는 말 자체만 들어도 구역질을 낸다. 그들이 종교적인 사람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제발 자기들을 상관 말고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자기들이 누릴 수 있는 인생의 즐거움을 다 맛보게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사람들의 무리를 나타난 대로 판단한다면 그런 자들이 대단히 많다. 번화한 유흥가에 가면 대다수 사람들이 그러한 것을 발견한다. 극장이나, 댄스홀이나 거리들은 그러한 사람들로 가득 차 있다. 그들은 촐싹거리고 지나가며 서로 같은 모습을 보이려고 애쓴다. 그들은 모든 심각한 생각, 심지어 이 신생의 진지한 관심거리마저 아예 모르는 척한다. 경건한 친구가 그런 사람들에게 진지한 말로 충고를 하면, 그들은 예의 하나는 밝아 과격한 행동은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경건한 친구가 등을 돌리자마자 비웃어 버리며 조롱하며 헛된 수고를 한다고 멸시해 버린다. 그들은 종교란 꼴보기 싫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에 배어 있다. 의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가 그 종교에 관심을 두겠는가라고 일축해 버리는 데 익숙하다.

 

꿈처럼 허무하게 깨어지는 환락의 잔

 

이러한 즐거움에 대한 대단한 환상이 짧게 끝나버릴 경우가 매우 흔하다. 이와 같은 세상에서 감각적인 쾌락의 잔을 입에다 대자마자 그 잔을 깨뜨릴 사건들이 일어나기 십상이다. 죽음이 이 쾌활하기 짝이 없는 부류들에게 불현듯 덮쳐와 그들의 덧없는 환락의 꿈에 재빠른 종식을 고할 수도 있다. 유행에 심취했던 사람이 갑자기 끊김을 당하여 무덤으로 옮겨지는 걸 보는 것은 그 얼마나 서글픈 장면인가! 그러한 사람들에게 죽을 병이 찾아올 때 고열이 나지 않는데도 놀라움으로 제 정신을 잃어버려 헛소리를 하기가 얼마나 쉬운가! 친절을 베푸는 것 같지만 잔인한 친구들은 갖은 술수를 다 써서 종교를 생각치 못하게 하며, 얼마 있으면 병에서 회복될 것이라는 희망을 불어넣어 그 불쌍하게 죽어가는 사람을 다독거린다. 그들은 그 사람이 사망의 먹이가 되어버릴 때까지 그런 일을 한다. 그러한 사건은 생존해 있는 같은 부류의 사람들의 느낌에 충격을 주지만, 그들은 그러한 느낌을 날려보내고 비통한 사건들을 망각해 버린다. 그리고 곧장 미끄러운 길로 달려나가고, 춤을 추며 그전과 똑같은 비열한 무분별에 빠진다.

 

어떠한 일이 일어나도 그들 중 한 사람이라도 자기의 삶을 숙고해 보다가 하나님께 돌아오는 그러한 일은 없다. 처음에 그들은 깜짝 놀란다. 잠시 멈추어 서기는 하지만 곧장 그 변화가 어떤 자연적인 원인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라고 해석해 버리거나, 어떤 이상한 기질적인 성벽이나 땅에 속한 소망이 좌절되어 일어나는 변화쯤으로 돌려버리기 일쑤다. 그 재난을 만난 사람이 자기들과 친밀한 친구였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이 그로부터 멀리 떨어져 금방 초연한 모습을 취한다. 흔히 그런 경우 그의 가까운 친척들이 그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가능한 한 그 사람과 한 무리였던 걸 부인하려 든다.

 

사람들이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니 하나님의 성품만 알면 그 성품을 존경할 것이라고 주장하려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얼마나 무모한 짓인가! 한결같은 경험으로 의문의 여지없이 확증된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쾌락을 사랑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는 것이다.

 

사변적이고 돈을 벌기 좋아하고 사업에 몰두한 사람들도 위에서 언급한 사람들만큼 많을 것이다. 비록 그들이 생각에 있어서는 보다 진지할지 모르지만 하나님에게서 멀리 떠나있고 신앙이 없는 점에선 그 사람들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젊은 사람들 속에서보다 중년층에 속한 사람들 속에서 이러한 류의 사람들을 만나기 때문에 그들의 성격을 묘사하거나 그들의 감정을 기술하려고 애쓰지는 않겠다. 본인은 어릴 적에 종교적인 인상을 받았으면서도 아직 하나님께 회심하지 않는 사람들의 체험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겠다.

 

 

양같이 유순했지만 끝내 엇길로 간 한 소녀의 회억

 

약 4, 50년 전에 나는 어느 가정에 자주 간 적이 있었다. 그 가정의 부모들은 종교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지만 신앙을 고백한 자들은 아니었다. 그들에겐 매우 상냥하고 귀여운 여덟 살이나 열 살쯤 돼 보이는 딸이 있었다. 그 딸은 훌륭한 경건의 모습을 다 갖추고 있었다. 성경을 사랑했고, 설교 듣기를 좋아했고, 신앙적인 사람들을 사랑했다. 그리고 한결같이 경건의 연습을 위해서 시간을 냈고, 마음의 느낌을 물어보면 거침없이 솔직하게 이야기하였다. 본인의 경험상, 이 어린 소녀의 경건만큼 의심해 보지 않은 적도 없었다고 생각한다. 건방지거나 주제넘거나 신성한  체하면서 억지를 부리는 모습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단아하고 겸손하고 모든 것이 한결같았다. 진지하나 새침떼기는 아니었고, 마음의 정취도 엄숙하고 유순하였으며, 억지로 꾸미는 그런 느낌도 주지 않았다. 그 어린 소녀가 입교를 원했다면 - 감히 누가 그러한 사랑스러운 어린 양을 우리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겠는가? 나와 그 어린 소녀와의 교분은 거기에서 끝이 났다.

 

그러나 몇 년 후 알고 보니, 성년이 된 그녀가 분별없이 구는 사람이 되어버렸고 종교적인 신앙고백을 완전히 버렸음을 알게 되었다. 내 이웃에 사는 감리교 목사가 그걸 알고 내 귀에 속삭일 기회가 있었다면, 그는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런 경우를 설명하는 건 하나도 어렵지 않다. 그 소녀는 하나님의 자녀였으나 은혜에서 떨어졌다” 나는 그러한 현상을 이런 식으로 설명하려는 걸 결코 용납할 수 없다. 내게 있어서, 주께서 자기 목숨을 내놓기까지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양들이 멸망하지 않는다는 진리보다 더 확신할 진리도 드물다.

 

은혜를 받은 사람의 심령 속에서 그 은혜가 너무 낮게까지 잦아들고 무언가에 덮여 있어서 하나님 외에 어느 누구도 은혜가 있음을 지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믿는다. 이 사랑스러운 소녀도 그러한 경우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후의 이야기는 나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잘은 모르지만 그녀가 아직도 살아 있어서 그리스도 교회의 일원이 되어 이 책을 정독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 할지라도 오래 전의 일이라 어릴 적의 자기 특징을 말해 주어도 기억이 없어 인정하려 들지 않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러한 모습은 한 사람에게만 해당되지 않고, 경우는 약간 다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해당된다.

 

부지런하고 뜨겁던 한 청년의 허무한 종말

 

나는 또 다른 경우를 잘 기억하고 있다. 역시 어린 시절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이 경우는 앞의 경우보다 그 내력을 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부모가 신앙적인 어느 청년이 영적 각성을 받으며 자기 영혼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집회란 집회는 부지런히 다 찾아다녔다. 깊은 겸비함의 모습도 보였다. 무얼 물어보면 대답은 잘했으나 건방지거나 자만한 모습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실로 기도회에 늘 참석하던 신앙적인 사람들 중에 그를 알아보거나 주목하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날씨가 험상궂은 어느 날 밤에 열린 기도회에는 참석한 사람이 불과 몇 사람밖에 없었고, 늘 경건회를 이끌어가던 사람들마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그 모임이 열리는 집 주인은 기도도 하지 않고 거기에 참석한 몇 사람을 돌려보내고 싶지 않아 그 청년에게 기도를 해보지 않겠느냐고 요청했다. 그는 기꺼이 승낙하였고, 기도를 이끌어갔다.

 

그 기도가 어찌나 뜨겁고 유창하며 그 표현이 풍성한지 그 기도를 들은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이때부터 그는 다른 어느 누구보다도 자주 대표기도를 하게 되었고, 공적인 예배에서도 기도인도를 자주 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은 설교보다도 그가 기도하는 걸 더 좋아하였기 때문이다. 사실 나도 그 소년의 기도처럼 ‘기도의 은사가 있는’ 경우가 없었다는 느낌을 가졌었다. 마치 영감의 인도를 받는 듯 거침없이 적절한 성경구절을 대며 기도해 나갔다. 그래서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가 배우고 있는 장사(그는 견습으로 일하고 있었음)를 그만두게 하고 공부를 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의 성원으로 그는 어렵지 않게 그 요구에 응하게 되었다. 그는 학문연구의 정규적인 코스를 시작했다. 성적이 대단히 뛰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꽤 훌륭하였다. 그러나 안타깝다! 사람이란 얼마나 악한지! 사람의 마음이란 얼마나 간사한지! 이 젊은 사람은 얼마 가지 못해서 자만과 자신감의 뿌리가 드러나 급소하게 자라는 모습을 아주 분명히 보이기 시작했다. 무엇이 잘 안되면 참아내지 못하였고, 선배들에게도 무례하게 굴었고, 아버지처럼 사랑하는 마음으로 책망하는 것도 달게 받지 않으려 하였다. 결국 목사 후보생 시험을 보게 될 때가 이르렀고, 그가 지원한 장로회는 그를 책임지지 못하겠다고 거절했다. 그 엄숙한 거절을 당한 이 사람은 자신을 겸비케 하기는커녕 분을 격발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다른 전문직을 연구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만일 그곳에서 도덕성과 기질에 있어서 자기의 좋은 습관을 잘 유지했다면 성공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쁜 무리들과 어울려 방종하게 되었고, 어떤 개선의 빛도 없이 너무 이른 나이에 생의 종말을 맞았다. 이런 사람이 목사가 되어 목회를 허락 받았다면, 죽는 날까지 성직은 계속했겠지만 비기독교적인 기질이 많아 해를 끼쳤을 것이다. “섰다 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아키발드 알렉산더, <영적 체험, 회심에서 임종까지>에서 발췌